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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의거 기념일

nyd만물유심조 2017. 3. 15. 11:12

 

 

 

 

3.15 의거 기념일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일어났던 마산 시민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사건을 기리는 날이다.

1960년 3월 15일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학생 시위대는 강제해산시키려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끝에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다수의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이에 분노해 파출소 몇 개소와 경찰관서, 국회의원과 경찰서장 자택을 습격했다. 이 결과 80여 명의 사상자(사망 7명)가 발생했고, 주모자로 구속된 26명은 공산당으로 몰려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한달 뒤 4월 11일, 이 사건으로 행방불명 되었던 마산상고생 김주열(金朱烈)군의 시체가 바다에 떠올랐다.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시신은 시민의 분노를 치솟게 했다. 마산 시민들은 경찰의 만행 규탄에 나섰으며, 3일 간의 격렬한 시위로 마산의 공공시설이 다수 파괴되었다. 마산시민의 분노에 찬 시위는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당국의 시정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부마항쟁을 시작으로 민주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즉, 1960년대 자유당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한 사건으로서 경남 마산에서 일어난 3·15 의거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고 독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개되면서 4·19 혁명을 촉발한 계기가 되었다.

 

자유당정권은 독재정치·정경유착·무력통일정책 등에 의해 집권 내내 국민의 능동적 지지를 얻지 못한 정권이었다. 단지 불법적인 헌법개정과 부정한 선거방식 등으로 국민의 위장된 동의에 근거하고 있었다. 자유당정권은 이미 1952년 발췌개헌, 1954년 사사오입개헌 등으로 1인장기집권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자유당조직, 경찰 및 관료조직, 반공단체 등을 동원한 이른바 '준봉(遵奉)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권 말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정치조작도 거듭된 실정(失政)에 의해 국민의 지지를 거의 상실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1960년 선거에 승리하는 데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자유당정권은 당시 84세인 이승만 대통령의 유고시(有故時), 그 계승권이 있는 부통령에 자유당의 제2인자인 이기붕을 무조건 당선시켜야 할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당정권은 종래의 정치조작보다 더욱 노골적인 선거부정을 획책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당정권은 산업금융채권 발행 및 은행융자에 따르는 뇌물과 대기업으로부터의 강제헌금 등으로 선거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선거관리부서인 내무부를 통해 첫째, 4할 사전투표, 둘째,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셋째, 완장부대 활용, 넷째, 야당참관인 축출 등 온갖 부정선거 방법을 준비했다. 이러한 사전음모에 따라서 선거는 매수·폭력 및 각종 부정개표 방법이 총동원되어 실시되었다. 그결과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5~99%에 육박할 정도로 나타났다.

이에 당황한 자유당정권은 득표율을 하향조정하여 이승만 963만 3,376표(85%), 이기붕 833만 7,059표(73%)를 득표한 것으로 발표했다. 이러한 공개적인 부정행위는 곧바로 국민의 필사적인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마산을 시발로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독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