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이야기, 폭정과 무늬만 민주주의?
‘폭군이야기’의 저자인 윌러 뉴웰 교수는 3000년 인류 정치사에 드리운 폭군의 그림자를 예리하게 파헤친다. 우리가 무심코 알거나 들었던 ‘폭군의 정의’는 그의 설명과 해석으로 더욱 명확해진다.
저자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장밋빛 믿음은 폭정을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면서 안심하게 됐다는 오류를 생성한다”며 “불의를 기억하지 못하면 훗날 그것이 정의로 바뀐대도 할 말이 없다. 인류는 그런 경험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요약은 544쪽에 이르는 거대한 역사적 기록과 해석이 낭비일만큼 아프고 무섭게 다가온다. ‘모든 권력자는 잠재적 폭군’일 수 있음을, 국민이 ‘기억 상실’로 현재의 폭력을 눈감아주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할 수 있음을 이 책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폭군 또는 폭정은 이성을 앞세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지금 시대까지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다만 양상만 달라졌을 뿐이다. 대놓고 행사한 게 아니라, 은밀히 또는 헷갈리게 진행된 게 차이라면 차이랄까.
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는 다수의 국가는 물리적 폭력은 자제하고 있지만, 권력을 사유화하는 넓은 의미의 폭정을 여전히 휘두른다. 그래서 헷갈린다. 폭정을 행사하지만, 뛰어난 리더십 때문에 때론 이 정의가 ‘역설’로 남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민주주의의 열렬한 수호자인가, 잔혹한 선동으로 강국을 이끈 폭군인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한 대한민국이 곧이어 다시 군부독재를 맞이한 아이러니는 세계 폭군의 역사에서도 고스란히 증명된다. 민주주의를 처음 탄생시킨 고대 그리스는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 후 스스로 민주주의를 버렸고, 공화국 로마는 제국이 되어 황제를 탄생시켰다. 시민의 힘으로 이룬 프랑스 혁명 역시 곧이어 최악의 공포정치를 목도했고,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외친 나치와 소비에트 공산주의는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저자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폭군은 예시에서 배제했다. 호불호의 측면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들이 대상이다. 유형은 세 가지다. 우선 ‘전형적’인 유형에는 로마의 네로 황제, 스페인의 프랑코 장군처럼 국가와 사회를 사유재산으로 여기면서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경우다. 자신과 일부 사람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 주력하지만, 때론 나라 경제를 일으키는 데 일조한다.
‘개혁형’ 폭군은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법과 제도, 복지의 개선을 통해 빈부 격차를 줄여 국민의 훌륭한 대표자로 인식된다. 하지만 이들은 공공의 명예를 자신의 것으로 독점하고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알렉산드로 대왕, 카이사르, 엘리자베스 1세, 루이 14세와 나폴레옹 1세 등이 이 유형에 속한다. 가장 헷갈리면서 매력적인 타입이다.
‘영원불멸형’ 폭군은 가장 위험하고도 복잡하다. 정치보다 종교에 가까운 이 유형은 전체주의처럼 현실 너머의 세상을 꿈꾸며 세뇌와 혁명을 주장한다. 볼셰비키의 스탈린, 나치의 히틀러, 중국의 마오쩌둥이 그 주인공이다.
유형이 어떻든, 폭군들이 내세우는 저마다의 명분과 신념은 ‘정의의 새로운 규정’이었다. 거짓이 진실이 되는 그 ‘뒤틀린 정의’를 통해 역사는 때론 저항에 부딪혔고, 때론 대중의 공감을 이끌었다.
뉴웰 교수는 “민주화 운동을 위해 독재자를 끌어내린다고 해서 반드시 더 나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며 “무늬만 민주주의인 사회에서 살면서도 그것이 폭정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최악의 민주주의가 최선의 폭정보다 낫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더 엉망인 정권이 들어서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