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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부패, 고려,조선후기 매관매직제도

nyd만물유심조 2017. 2. 3. 12:54

 

우리나라에서 매관매직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주로 고려시대 중엽 이후부터로 알려져있다. 이른바 문벌귀족 시대가 끝나고 군부가 집권하면서 횡행하기 시작한 매관매직은 고려왕조 말기에 매우 활발했으며 조선왕조 초기에 많이 근절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대규모 전쟁을 겪고 난 이후 재정 문제 타개를 위해 백지 임명장인 공명첩(空名帖)이 남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렸던 조선왕조 말기였다. 이때부터는 아예 매관매직제도가 정착이 되기 시작했고 거의 모든 외직은 매매되기 시작했다. 당시 주한 일본 외교관의 기록에 의하면 1866년 시세로 감사는 2만냥에서 5만냥,

부사는 2000냥에서 5000냥,

군수와 현령은 1000~2000냥에 거래됐다고 한다.

작은 고을의 수령 ·진장을 비롯해 지방의 감사 ·유수 ·병사 ·수사 등 거의 모든 형태의 외근직이 매매됐다. 대략적인 정가는 잡혀있지만 경쟁자가 많을 경우엔 돈을 많이 써야 실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지방직 자리는 점점 비싸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작은 고을 수령자리 하나가 3만냥까지 뛰어올랐다.

 

한예로 조선왕조 말기, 충청도 한 고을에 '강복구'라는 이름의 사또가 있었는데 이 사또는 사실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였다. 과부가 된 돈 많은 퇴기가 기르던 개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사또가 됐고 과부는 복구에게 감투를 씌워줬다.

 

집에서 뒹굴던 강아지를 사또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매관매직제도. 당시에는 원납전(願納錢)이라 하여 동네 부잣집에 일단 아무 벼슬이나 내린 후에 돈을 강제로 받아가는 매관매직제도가 유행했다. 동네 사람 모두가 복구네 집이라 하니 복구를 강아지가 아닌 집주인으로 착각했던 것. 결국 존재하지도 않는 강복구를 사또로 일단 임명시킨 후 5000냥을 받아갔다.

 

이 강아지 사또 이야기는 조선말기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런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비롯해 왕조시대의 매관매직제도는 그 역사가 매우 길다. 보통 망국의 조짐 중 하나로만 알려져있지만 매관매직은 장기간 전쟁이나 흉년이 발생해 세수가 줄어들면 재정문제 타개를 위해 항상 행해지던 제도였다.

 

앞서 강아지를 사또로 만든 제도인 원납전 제도는 경복궁 중건 등으로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던 흥선 대원군 정권에서 본격화됐다. 민간에서는 이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제수받은 반갑지 않은 관직을 '벼락감투'라고 했다고 한다. 원납전에 의해 억지로 관직에 임명되면 관직값을 내느라 가산을 탕진하는 것이 마치 벼락을 맞은 것과 같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