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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전 이란 대통령 서거

nyd만물유심조 2017. 1. 10. 20:17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전 이란 대통령이 1월8일(현지 시각)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이란 언론들이 보도했다. 83세로 장례식은 1월10일 치러졌다.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83세)은 1979년 이슬람 시아파 지도자 호메이니를 도와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란 이슬람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혁명 직후 출범한 정부에서 내무장관으로 일했고 1989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다. 1993년 대선에서도 승리해 1997년까지 이란을 통치했다.

 

1934년 부유한 피스타치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신학 공부를 위해 집을 떠났다. 스승이 호메이니였다. 63년부터 78년까지 이란 왕정에 반대하면서 5차례 투옥됐다. 당시 이라크에 망명 중이던 호메이니와 긴밀한 연락을 유지했다.

 

이란혁명 후엔 종교 지도자(아야톨라)였지만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권력 수뇌부의 내로라하는 자리를 지켰다. 79년 11월부터 9개월간 혁명 정부의 내무장관에 임명됐다. 이듬해엔 이란 의회(마즐리스) 의장으로 선출돼 9년간 재임했고 89년부터 97년까지 대통령으로 지냈다. 83년부터 최근까지 34년간 국가지도자운영회의 위원이었다.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권한을 가진 기구다. 89년부터 국정조정위원회 의장이기도 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이란·이라크 전쟁(80~88년)으로 인해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시장경제 정책을 도입했다. 이 과정에서 치부했다는 구설도 있다. 2003년 포브스는 라프산자니를 10억 달러(약 1조2000억원)가 넘는 거부로 추정하기도 했다.

 

89년 호메이니 사후에 현 하메네이를 최고지도자로 선출하는 데 결정적 영향력을 행세하기도 했다. 둘은 이후 때론 협력, 때론 긴장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년) 이후 경제 회생을 위해 해외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이슬람 율법에 따른 극형을 반대하는 등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다. 정치적 수완도 뛰어났다는 평가다. 퇴임 후에도 온건 세력의 버팀목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뉴욕타임스는 "라프산자니는 미국 등 서방과 관계개선을 지지하며 이란 개혁파의 후견인 역할을 해왔다"며 "그의 서거로 하산 로하니 현 대통령이 이끄는 이란 개혁·개방의 추동력이 약해지는 등 이란 정치가 불확실성에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