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조선 선조때 임진왜란시 육지전 최초승리한 부원수 신각(申恪), 도망간 원수 김명원에 의해 오히려 죽어

nyd만물유심조 2016. 12. 28. 18:35

 

 

 

 

 

해유령 전첩지, 경기도 기념물 39호,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부흥로 411

 

<해유령 전승 기종 사적비> 비문 전문

 

단군 성조(聖祖, 성스러운 시조)께서 거룩한 나라를 여신 후 누천년(累千年, 여러 천년)을 지나는 동안 아름다운 강토를 노리고 침범해 온 외적(外敵, 외국 침략군)의 무리가 그 얼마였던가? 그러나 선조들은 그때마다 조국 수호의 성업(聖業, 성스러운 일)에 기꺼이 한몸을 던져 결연히 이 땅을 지켜냈으니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지극한 평화와 눈부신 번영은 온전히 그 헌신의 아름다운 대가(代價)요 풍요로운 열매이리라.

 

우리 민족이 극복해낸 그 숱한 외침 중에서 왜란(倭亂, 임진왜란)처럼 참혹한 수난은 없었다. 왜적은 척박한 땅에 문명을 전해준 은혜를 외면한 채 단기 3925년(1592년) 4월 13일 침략의 칼끝을 이 땅에 들이밀었다.

 

이 땅과 백성이 처참히 유린되는 참혹한 병화(兵禍, 전쟁의 피해) 속에서 충의(忠義, 충성과 의리)의 의사(義士, 의로운 인물)들은 눈물겨운 헌신과 희생으로 사직과 국토를 온전히 보존하였으니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들은 곳곳에서 흉적을 몰아내고 이순신은 왜적의 함선들을 모조리 푸른 물결 아래 쓸어 넣었다.

 

자신이 죽을 자리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나라를 위해 의연히 한몸을 바친 충신들의 빛나는 업적은 오늘도 해와 달처럼 휘황하거니와 이곳 양주 해유령에도 왜적과 싸워 승리를 거둔 충신들의 눈부신 활약이 있어 그 남긴 자취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더욱 역력히 우리의 가슴에 사무치니 후손된 누군들 이 자리에 서면 그 마음 숙연해지지 않으랴!

 

임진년 4월 14일 왜적이 날카롭고 서슬 푸른 기세로 들이닥쳐 부산 동래가 함락되고 이어 4월 28일 충주 방어선마저 무너지자 국왕 선조(宣祖)는 4월 30일 정처 없는 피란길에 오르고 왜적의 잔인한 약탈과 살육의 소문에 상하 군민(軍民, 군인과 민간인) 모두는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저항의 의지를 상실한 채 극단의 공황 상태로 빠져들었다.

 

국왕 선조는 김명원을 도원수로 신각을 부원수로 삼아 한강 방어선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고 이양원에게는 유도대장이 되어 한성 한양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거침없이 밀려오는 수 만 명의 왜적에 비해 이에 맞설 우리의 병력은 이미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5000명에 불과한 상황에서 도원수 김명원이 부원수 신각의 적극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먼저 진지를 벗어나자 전의를 잃은 도성 방위군은 왜적이 미처 한강에 당도하기도 전인 5월 2일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한강 방어선을 속수무책으로 포기한 부원수 신각은 임진강 방면으로 도주하는 도원수 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도성 북쪽 양주에 머물며 병사들을 수습하는 중에 때마침 군사를 이끌고 내려온 함경병사 이혼과 양주 장수원 등에서 전투를 치르며 북상해 온 인천부사 이시언의 병력을 합쳐 비로소 전투가 가능한 대오(隊伍)를 편성하고 양주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한편 도성을 점령한 왜적은 평양과 함흥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먼저 선발대를 편성하여 양주로 보냈는데 이들은 양주 일대를 약탈하며 음력 5월 16일(양력 6월 25일) 이곳 해유령에 도착하게 된다. 적의 움직임을 면밀히 추적하던 조선군은 고개 좌우에 은밀히 매복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고개를 넘는 왜적을 급습하여 적병 70여 명을 한자리에서 몰살하였다. 왜란 발생 이후 육지에서의 거듭되던 패전을 비로소 극복하고 마침내 첫 승리를 거두는 감격적인 순간이었고 왜적이 접근한다는 소문만으로도 두려움에 떨며 무너지던 조선군이 우리도 왜적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의미있는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이 뜻깊은 승전이 참으로 어이없는 참변(慘變, 비참한 사고)으로 이어졌으니 누군들 이 참혹한 사태를 짐작이나 하였으랴? 한강과 도성 방어선이 한꺼번에 무너졌다는 보고를 들은 국왕 선조가 측근 한응인을 파견하여 패전을 질책하자 다급해진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 방어 실패의 원인이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무단으로 이탈한 부원수 신각에게 있다고 책임을 전가하였고 조정에서는 우의정 유홍의 주도로 신각을 처형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해유령 전투 이후 함경도로 진군하는 왜적을 막기 위해 대탄(大灘)에서 물러나와 방어진을 치고 있던 신각은 억울한 참형(斬刑, 목이 잘리는 형벌)을 당하고 말았다.

 

신각을 처형하기 위해 선전관이 출발한 그날 오후 신각이 올린 전승 보고서와 함께 획득한 왜적의 머리 70여 개가 도착하자 비로소 진상을 파악한 선조는 급히 처형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선전관이 당도하기 전 해유령 전승의 지휘관 신각은 이미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였다. 1592년 음력 5월 19일 해유령의 승전고(勝戰鼓, 승리의 북소리)가 울린 지 불과 사흘 후의 일이다.

 

신각 장군의 아내 또한 남편의 시신을 수습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집에는 신각이 노심초사 걱정하던 90 노모만이 세상에 홀로 남는 참혹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신각은 강화와 경상도의 수사(水使, 수군 지역 대장)를 역임하였고, 일찍이 황해도 연안 고을에 부임하여서는 성내에 우물을 깊이 파고 각종 무기를 많이 비축하여 이로써 후일 이정암(李廷?)이 연안에서 왜적 3000여 명을 도륙하는 토대를 미리 마련하기도 하였던 지혜로운 명장이었다.

 

신각과 함께 싸운 함경병사 이혼은 신각의 억울한 죽음에 실망하여 군사를 물려 함경도로 돌아갔으나 국경인(鞠景仁) 등 반역자들에 의해 함경도 전체가 왜적의 손에 떨어질 때 역도들의 손에 죽었고, 유도대장 이양원 역시 의주에 피란해 있던 선조가 다시 요동으로 건너간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탄식하며 8일간 단식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으니 이 또한 가슴 시리도록 참혹한 일이었다.

 

피 흘린 충신들의 사적이 낱낱이 밝혀지매 여기 피 어린 해유령 언덕에 서기 1977년 유생(儒生,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 김주현(金周鉉) 선생과 지역 유림 및 뜻있는 이들이 이를 기려 함께 탑과 비를 세우고 그 후 충현사(忠顯祠)를 지어 향화(香火, 제사의 향불)를 올렸다.

 

이를 더욱 선명히 하고자 해유령전승보국충신숭모사업회의 조태훈(趙泰勳) 회장을 비롯한 제현이 뜻을 모아 글을 다듬고 최형국(崔炯國) 박사의 감수를 받아 정성껏 사적비를 세우니 이로써 님들이 이루어 낸 눈부신 승리의 영광은 온누리에 뚜렷해지고 그 남긴 자취는 만대에 영원하리라.

 

후손들이 시절을 따라 고개 숙여 정성 어린 향(香)을 사르리니 충혼(忠魂, 충성스러운 영혼)들이시여, 평안히 쉬시며 부디 이 나라와 자손을 축복하시어 속히 통일의 대업(大業, 큰일)을 이루고 만방(萬邦, 세계)에 우뚝 솟아 번영하도록 도우소서.

 

단기 4348년 서기 2015년 12월

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홍정덕(洪晸悳) 삼가 지음

한국서예박물관 관장 양택동(梁澤東) 삼가 씀

해유령전승보국충신숭모사업회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