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四一九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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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은 1960년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시민들이 거족적으로 항거하여 1960년 2월 28일 대구민주운동을 시작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1960년 4월 26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시민혁명이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 학원 통제와 3·15부정선거에 반발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시작되어, 이후 시민들이 합세한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었고 끝내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고 제2공화국이 들어섰다.
- 직접적인 원인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 나타난 국민들의 야당지지 성향과 투표결과를 분석한 자유당 정권은 순리적인 선거를 통해서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1960년 정부통령선거를 처음부터 관력을 동원하여 부정하게 치를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음모는 정의감에 불타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의 사본을 민주당에 공개함으로써 백일하(白日下)에 폭로되었다. 3월 15일 선거 당일에는 마산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벌였고, 시민들도 학생 데모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4월 11일, 그동안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생 김주열(金朱列)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자, 마산은 물론이고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하였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4월 18일 고려대생 3,000여명의 의사당 앞에서 연좌(蓮座) 데모를 한 후 귀교하는 길에 정치폭력배들의 습격을 받아 1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고려대생들의 4.18데모는 그 다음날 학생들이 총궐기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 4·19혁명의 전개
4 · 19혁명 전 수주일 동안 주로 지방도시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불법선거 및 자유당과 경찰의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에 항의하는 시위를 산발적으로 행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상황의 급박성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고, 또 그럴 수 있는 능력도 결여되어 있었다. 마산에서의 시위에 대하여 이승만은 4월 15일, 그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런 사태의 비극에 책임이 있는 “무분별한 사람들”의 죄는 간과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이승만은 “젊은 청년들”을 폭동으로 유도하고, 선동하는 “정치적 야심가”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활동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이승만의 이런 견해는 협박과 강제력행사를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으로 학생들을 더욱 격노하게 하였다. 4월 18일에는 서울에서 시위하고 있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경찰의 비호를 받고있는 반공청년단의 폭력배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다. 아무리 이승만정권이 합법적인 권위를 지녔다고 주장하더라도 이제는 시민과 학생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고 있었다. 이승만정권이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강력하고 적나라한 폭력을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4월 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그 가운데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경찰은 데모대에 대하여 발포하기 시작했으므로 학생들의 시위는 폭동으로 화하였다. 전국적으로 부산 · 광주 · 인천 · 목포 · 청주 등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수천명의 학생들이 가세하였다. 서울에서만도 자정까지 약 130명이 죽고,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우리나라의 주요 도시에 계엄령이 반포되었다.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중장 송요찬(宋堯讚)이 서울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4월 19일 이후 데모와 폭동이 연일 계속되었다. 이제 학생이 아닌 일반시민들도 가담하였다. 그러나 군대는 유혈사태를 경계하고 재산의 파괴를 방지하는 데 신경을 쓰면서 방관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승만은 반정부시위에 관하여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4월 21일 내각이 전국의 혁명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다음날 이승만은 당시 정부 내에서 어떤 직위도 가지지 않은 2명의 정치인을 불러들였다. 한 사람은 전 국무총리였던 변영태(卞榮泰)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전 서울시장이었던 허정(許政)이었다. 이승만은 이들에게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도움을 간청하였다.
두 사람은 이승만과 가까이서 일한 적이 있었고, 또 이승만은 이들에게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과 만난 자리에서 두 사람은 상황이 이미 자기들의 통솔능력을 뛰어넘었다고 말하면서 이승만의 각료로 들어가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기붕을 설득하여 모든 정치활동으로부터 물러나도록 하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이어 당시 부통령이었던 장면은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사임할 것을 촉구하면서 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장면은 부통령으로서 자기가 이승만의 사임으로 대통령직을 이어받도록 되어 있는 한, 이승만은 결코 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시위대들은 새로운 선거의 실시 대신에 이승만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하였다.
이승만은 자기가 자유당을 비롯한 모든 사회단체와 결별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시위군중을 진정시키려고 하였다. 아울러 그는 앞으로 경찰을 포함한 정부관리들이 정치적 간섭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승만은 정부의 모든 권력을 이양받으리라는 약속과 함께 허정에게 외무부장관직을 수락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외무부장관으로서 허정이 지명되었던 것과 결부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승만이 사임을 결심할 경우에 부통령이 없는 상황에서 허정이 대통령직을 맡게 된다는 데에 있었다.
시위군중들은 이승만의 약점을 알아차린 이상 더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점점 더 광포해지기 시작하여 반공청년단과 자유당간부의 집을 파괴하고 방화하면서 다녔다. 4월 25일 시위의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다. 각 대학 300여 명의 교수들이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제자들을 지지하면서 서울시내를 행진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4월 26일 새로 지명된 외무부장관 허정과, 계엄사령관 송요찬, 그리고 주한 미국 대사였던 맥카나기(Macanarghy,D.P.)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승만은 대통령 · 부통령의 선거가 새로 실시될 것이고, 헌법도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 내각제로 바꾸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승만정권의 붕괴는 경찰력에 의하여 유지되었던 정치권력이 학생들이 선봉에 선 반경찰 · 반관료적 대중에 굴복하였음을 의미한다.
경찰력이 자유당의 주요 골격을 이루어왔다는 것은 4 · 19혁명 후 경찰력의 마비로 인하여 자유당이 하룻밤 사이 붕괴됨으로써 명백하게 드러났다. 교수들의 시위로 시작된 시위의 새로운 물결, 미국으로부터의 압력, 경찰력의 붕괴,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으로부터의 지지결여 등등에 직면하여, 이승만은 1960년 4월 26일 사임을 발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틀 전에 이승만으로부터 외무부장관으로 임명된 허정은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 사임 이후
이승만 사임 이후 외무부장관 허정이 수석 국무위원으로서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허정은 5월 3일 5개의 시정방침을 발표했는데, 제2항에서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단행하겠다’고 언급하며 3·15부정선거에 대한 이승만 정권 관계자와 자유당 간부의 책임을 최대한 축소시키겠다는 의중을 드러냈다.
시민들은 부정선거 원흉 및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처단을 요구했다. 최인규는 5월 3일 부정선거 총지휘 혐의로 구속되었고, 다음날엔 치안국장 이강학이, 7일에는 자유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한희석이 구속되었다. 기타 자유당 관계자 및 국무위원 등 3·15부정선거 및 4·19혁명기 발포명령자들 또한 구속되었다. 더불어 과도정부는 ‘부정축재 처리안’을 의결해 과거 부정을 자진신고하게 하고, 부정축재분을 사회에 환원하도록 통고했다. 과도정부의 소극적 태도와 문제의 복합적 성격으로 인해 부정선거 원흉과 부정축재 처리는 다음 정부로 이월되었다.
4월 26일 통과된 시국수습결의안을 통해 기존 의원이 해산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은 6월 10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고, 15일 재적의원 211명 중 찬성 208표, 반대 3표로 가결되었다. 이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성사된 합헌적인 개헌이었으며, 대통령은 국회의 양원 합동회의에서 선출하기로 결정되었다.
7월 29일에는 제5대 민의원 의원선거와 제1회 참의원 의원선거가 진행되었다. 이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민의원 전체 의석 233석 중 민주당이 175석을, 참의원 전체 의석 58석 중 민주당이 31석을 얻게 되었다. 이를 통해 제2공화국이 출범했고, 8월 8일 제2공화국의 첫 국회가 개원했다. 8월 12일 윤보선이 제2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다음날 정식 취임하였다. 이후 8월 19일 민의원 회의에서 장면이 국무총리로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