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여왕의 하야
-진성여왕의 행태
우리 역사에서는 여자 지도자가 딱 3명 있었다. 신라시대 때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다.
이 가운데 진성여왕은 1천년 역사의 신라를 무너뜨린 주범으로 지목된다. 자신의 숙부인 각간 위홍과 ‘사통’(私通)을 한 것도 모자라 위홍이 사망한 뒤에는 아름다운 소년 2-3명과 향락을 즐겼다. 2012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나온 ‘역주 삼국사기’의 해당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진성여왕은 젊은 미남자 2, 3명을 몰래 끌어들여 음란한 짓을 하고 그들에게 중요한 관직을 주어서 나라의 정치를 맡겼다. 이로 말미암아 아첨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된 사람들이 뜻을 마음대로 펴게 되어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상과 벌이 공정하지 못하여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느슨해졌다.”
삼국유사에는 유모인 부호부인과 그녀의 남편인 위홍 등 서너 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국정을 어지럽혀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고 돼 있다.
진성여왕의 잘못은 이뿐만이 아니다. 신라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며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데도 심한 낭비와 사치로 국고를 텅텅 비게 했다. 그러자 각 지방 호족들을 겁박해 세금 납세를 독촉했고 이는 호족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또 빈곤에 시달리던 민심도 점차 흉흉해져 여기저기서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빈곤에 시달리던 민심으로 양길, 궁예, 견훤 등 나라 안 곳곳에서 왕을 지칭하는 자들이 16여명이나 되었고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던 것이다.
신라의 분열이 극에 이르자 895년 최치원은 국가개혁을 위한 ‘시무16조’를 진성여왕에게 진상했다. 진성여왕은 최치원에게 육두품에게 제수할 수 있는 제일 상위직인 아찬직을 주고 그의 개혁안에 따라 조정을 일신하고자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시무책을 통한 그의 정치 개혁안은 당시 신라의 정치 환경으로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정치적 정황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실정을 거듭하던 진성여왕이 내란상태가 겉잡을 수 없게 되자 진성여왕은 신하들에게,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면서 도적들이 봉기하는데, 이것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진 사람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했다.”라고 말하고, 즉위한 지 11년 6개월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자신의 오빠인 헌강왕의 서자(庶子) 요를 왕태자로 삼아 왕위를 선양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자진 ‘하야’를 한 것이다. 그가 바로 신라 제52대 효공왕(897∼912)이다. 기록에 의하면 진성여왕은 그 후 해인사로 들어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