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분신자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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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全泰壹, 노동운동가, 1948년 9월 28일 (음력 8월 26일) ~ 1970년 11월 13일)은 경북 대구시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1954년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주하여 염천교 밑에서 살며 남대문국민학교를 잠시 다니다가 1963년 3월 대구로 내려가 명덕초등학교(당시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지만, 가정 사정으로 1학년 재학 중 그해 12월 자퇴하였다. 이후 다시 1964년 상경하여 17세의 나이로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 ‘시다’ 즉 미싱사 보조로 취직하였다.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 꼬박 3년을 보내고 미싱사, 재단 보조 등을 거쳐 오랜 소원이던 ‘재단사’가 되었다. 14시간 노동을 하며 당시 차 한 잔 값이던 일당 50원을 받았는데, 자신보다 더 어린 나이에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모습을 보면서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68년에 우연히 "근로 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고는 독학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1969년에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하여 "근로 기준법"의 내용과 현재 근로 조건의 부당성을 알리는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 활동은 사업주들의 탄압으로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이 일로 평화 시장에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 되었다. 1970년 9월 평화 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재봉사보다 지위가 높은 재단사로 일하며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 친목회를 조직하였다. 다시 노동 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을 받아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 내용이 "경향 신문"에 실려 주목을 받자 전태일 등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으나 정부의 약속 위반과 사업주들의 무시로 번번이 좌절을 겪게 되었다.
이에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1970년 11월13일 "근로 기준법"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이라고 고발하는 뜻에서 "근로 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결의하고 플래카드 등을 준비해 평화 시장 앞에서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자본가들과 경찰의 방해로 플래카드를 빼앗기는 등 시위가 무위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을 때, 전태일은 갑자기 몸에 석유를 끼얹어 불을 붙이고,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온몸에 불이 붙은 채 평화시장 앞을 달리다가 쓰러졌고, 그날 밤 사망하였다.
전태일은 간단한 응급치료 외엔 서너 시간을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가 화기를 가시게 할 수 있다는 주사가 있다는 병원으로 오후 4시경 구급차에 실려 서울 성모병원 응급실로 다시 후송되었지만, 비싼 주사 가격과 근로감독관의 보증을 받아오라는 의사의 요구에 근로감도관의 거절 등으로 방치되다가 11월 13일 오후 10시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 후 그의 가족들도 모두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특히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삶은 아들 전태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들, 딸들의 말을 지켜주기 위한 어머니의 삶으로 바뀌게 된다. 한 아들의 어머니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로서 이소선은 '청계천 노동자들의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불리우는 전설이 되었다. 전태일의 여동생인 전순옥도 그의 뒤를 따라 노동운동가가 되었고,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때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당선되어 19대 국회의원직을 역임했으며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의 29번, 15번째 주자로 연설했다. 남동생 전태삼도 형의 뒤를 이어 노동운동가로 활동중이다.
전태일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의 모란묘지공원에 있는데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묘지도 근처에 있다.
- 의의와 평가
전태일의 분신 항거 자살을 계기로 평화시장에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가 결성될 수 있었으며,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전태일의 유언에 따라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였다. 또한 전태일의 분신 항거는 정부의 산업화과정에서 희생당하던 노동자의 삶이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1984년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85년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하였다. 전태일재단에서는 ‘전태일문학상’, ‘전태일노동상’을 시상하고 있다. 1988년 11월 전태일 정신을 기리기 위한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 대회’가 개최되면서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는 전태일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