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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nyd만물유심조 2023. 8. 18. 14:12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인근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조선인민군 군인 30여명이 도끼를 휘둘러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주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주한 미군 및 대한민국 국군 병력 절대다수에게 피해를 입힌 사건이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유엔군과 북한군의 초소가 서로 중첩되어 설치되어 있었다. 특히 북한은 유엔군과 조율 없이 남쪽 지역에 5개의 초소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유엔군의 초소는 북한군의 초소에 둘러싸인 형국이었다. 특히 사건이 발생한 제3초소는 JSA남쪽 모퉁이에 자리 잡았고,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넘어 오는 북한 측 출입 통로의 초입이기도 했다.

당시 판문점은 물리적인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단어 그대로의 공동경비구역이었는데, 유엔군 측 3초소(CP 3)는 조선인민군 육군 초소 3개소(KPA 4, KPA 5, KPA 8)에 포위당한 지점에서 항상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5초소(OP 5) 측에서 3초소를 지켜보고 있어야 했는데, 이 문제는 미루나무가 3초소와 5초소 중간에 위치한데다 무럭무럭 자라며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8월 3일 UN군 경비대 작업반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면 3초소가 위험하니 안전 도모를 위해 미루나무를 자를 것을 권고했다.

이에 8월 6일 한국인 노무자 4명과 UN군 병사 4명이 미루나무 절단을 시도했는데 북한군이 다가와 이의를 제기하면서 돌아가라며 작업을 중단시키자 UN군은 일단 후퇴하였다. 이후 경비대는 8월 18일 절단이 아닌 시야확보를 위한 가지치기만 하는 것으로 작업을 결정, 오전 10시 30분 한국인 노무자 5명을 동원하여 가지치기 작업에 들어갔으며 경비대 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 소대장 마크 배럿 중위 등 UN군 장교 2명 및 병사 4명, 국군 장교 1명 및 병사 4명 등 총 11명의 병사들이 작업 감독에 나섰다.

그러자 북한군 군관 2명과 하전사 8명이 나타나 재차 항의했으나 UN군은 베는 것이 아니라 가지치기 작업을 하는 중이라 설명했고, 이에 현장에 있던 북한군도 상층부에 연락을 한 뒤 답이 오자 가지치기 정도면 OK라고 수긍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가지치기 작업은 순조로웠고 북한군은 오히려 노무자들에게 가지를 잘 치는 법에 대해 조언을 하기도 할 정도로 화기애애 했다.

그런데 10시 47분에서 50분 사이, 박철 중위 등 북한군 장교 2명이 15명의 병력을 이끌고 현장에 나타났고 박철 중위는 보니파스 대위에게 갑자기 작업 중단을 요구했다. 보니파스 대위는 방금 전에 북한군이 허용해놓고 갑자기 또 중단하라는 박철 중위의 말을 무시하고 작업을 속행할 것을 지시하자 박철 중위는 북한군 1명을 북한 경비본부로 보냈다. 그렇게 11시 30분경 북한군 20여 명이 트럭을 타고 추가로 도착했다. 이 때 박철 중위가 "그만두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재차 위협을 가했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무시했다.

박철 중위가 소매를 걷고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호주머니에 넣으며 신호를 보내자 북한군들은 일제히 소매를 걷었고, 박철 중위가 "죽여!"라고 소리를 지르자 북한군들은 트럭에 싣고 온 둔기와 한국인 노무자들이 사용하던 도끼를 이용해 기습적으로 집단 폭행을 가했다. 보니파스 대위가 북한군의 구타에 가장 먼저 쓰러졌고, 북한군 5명이 쓰러진 그에게 달려들어 도끼로 머리를 찍어서 살해했다. 마크 배럿 중위는 구타를 당한채 방치되었으며 발견 당시에는 살아 있었지만 이송 중 사망하였다. 나머지 병사들도 유엔군 병사 1명을 제외한 전원이 부상을 당했다.

-미국의 대응
이 사건에서 살해당한 미군 장교는 미국의 장교이기 전에 UN군 소속의 장교들이었다. 이것의 의미는 단순히 미국과 북한의 문제를 넘어, 이 사건이 UN에 무력도발을 한 국제적인 대도발 사건이 되었다는 의미다. 이 사태의 최대 피해자인 미국은 매우 분노했다. 당시 UN군 사령관이자 미 육군 대장이었던 리처드 스틸웰 장군은 휴가차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사건의 보고가 자신에게 올라오자마자 바로 전투기에 탑승하여 급히 한국으로 입국했다. 한국에 입국한 스틸웰 대장은 즉시 회의를 소집한 뒤,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데프콘 3를 발동시키자는 합의를 내렸다. 이에 미국은 1만 2천명 가량의 육군과 1800명의 미 해병대를 증파했고 미국의 최강 정예 해군이라 불리는 미 해군 7함대와 B-52 전략 폭격기 3대까지 추가 배치되었다.

8월 19일에 들어 미국은 군사정전위원회 개최를 요구했으나, 북한 측은 여전히 경비장교회의를 운운하며 미국의 사과를 받는 적반하장인 태도로 나와 협상은 결렬되었고, 스틸웰 장군은 그 날 바로 워싱턴 국가안보회의에 데프콘 3를 발동하겠다고 보고했다. 마침내 국내에서 처음으로 데프콘 3가 발령되었다. 이로 인해 6.25 전쟁 이후 최초로 주한UN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준전시 체제에 돌입했으며, 북한군도 이에 맞서 북풍 1호(준전시 체제)를 발동, 전군 완전 무장을 지시했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으로 미&남 vs 북한 구도로 대치하는 가운데,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이 세워졌다. 미군과 한국 제1공수여단 지원병력 감시 하에 미루나무를 벌목한다는 작전이었다. 미 해군은 동아시아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있는 제7함대의 가용 전력을 총동원하고, 미 공군 역시 한국과 일본 주둔 병력 외에도 한반도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있는 괌의 폭격기를 동원했으며, 미 육군도 12,000명의 증파 요청을 감안하면 최소 사단 단위의 병력의 증파를 계획하는 등 여러모로 미국도 당시 한반도에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했다.

육군 항공대의 AH-1 공격헬기 7대와 다목적 헬리콥터 20대의 직접 엄호 및 도끼와 권총으로 무장한 채 30여 명으로 이루어진 미군 공동경비부대들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같은 판문점 주변의 주요 시설들을 안전하게 확보했고, 미 육군 공병 8명으로 이루어진 2개 팀이 전기톱으로 미루나무를 자르는 데 성공했다. 북한 측은 맞대응으로 판문점에 자동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200여명의 병력을 배치했지만 미군에게 직접 대응할 엄두는 못내고 있었다. 이에 따라 보복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작전은 그대로 종결되었다.
특별히 이 작전이 시행되기 전 군사분계선 부근에는 "데프콘 2"가 발령되었다.

-한국의 대응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통해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 대원들로 이루어진 64명의 결사대를 조직한다. 1공수특전여단의 지역대장이었던 김종헌 소령이 이 결사대의 지휘관을 맡았다. 이 결사대가 해당 작전 지역에 투입되어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미 육군 공병들을 엄호하고, 육군 제1보병사단 수색대는 그 일대에 매복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보복작전이 수행됐다.

특전사 결사대원들은 카투사로 위장, 권총과 수류탄은 전투복 속에 숨기고, 크레모아, M79 유탄발사기 등은 삽, 곡괭이 등 작업도구 밑에 감추는 식으로 트럭에 탑승하여 공동경비구역에 들어가 도끼와 곡괭이자루를 가지고 북한군 초소 4개를 파괴하였다. 대원들이 초소에 접근해 손에 도끼와 소총을 들고 활보하며 초소를 난장판으로 만들자, 북한군은 모조리 도망쳤다. 간간히 나타난 북한군은 독이 오른 특전사 대원들이 위협을 하며 욕을 퍼붓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당시 매복 작전을 수행 중이던 1사단 수색대원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러다 정말 일이 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특전사 결사대는 북한군이 특전사의 공격에 대해 무력 대응을 할 경우엔 북한군들을 과감히 사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만 '먼저 북한군을 사살하지는 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즉, 북한군을 구타하고 깽판을 놓다가 북한군이 발포하면 바로 응사해서 사살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에게 선제공격을 당하는 대원들은 전사하게 될 것이므로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결사조로서의 투입인 것이다. 실제로 출동 직전에 유서와 손톱 등을 남겼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북한군이 처음부터 저항없이 무조건 도망가기만 해서 교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실제로 작전에 투입된 1공수 대원 증언에 따르면 유서 작성,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서 남겼고, 출동 전까지 외출 외박이 금지된 채 영내 대기를 하였다. 초소를 부술 때 북한군 초소 병력들은 도주를 했지만, 곧이어 소총으로 무장한 병력들이 분계선을 따라 도열하여 대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발포 등의 공격은 없었고 모든 초소를 파괴하는 걸 구경만 하였다. 특전사 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무표정한 북한군 무장 군인들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초소를 파괴하는 동안 나머지 특전사 대원들도 소총으로 무장하고 북한군 출동 병력과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미국은 어디까지나 나무를 벌목하기만 하고 북한의 반응을 볼 계획이었기에, 실제 전쟁을 수행할 전력을 동원했어도 무력 시위에만 그쳤고, 그렇다 보니 한국 육군 특전사 대원들이 갑자기 북한 초소를 공격하는 급발진에 대경실색했다. 미루나무를 자른 후에 특전사 대원들이 북한군에 욕설을 퍼붓고 인민군의 초소로 달려나가자 엄청 당황했다고 한다. 미군이 전쟁 발발을 우려해 결사대를 제지하자, 특전사 대원들은 북측 도로 차단기를 제거하기 위한 진격에 불응하는 미 육군 트럭 운전병을 권총으로 위협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