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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암살되다

nyd만물유심조 2023. 6. 22. 20:52


김구(金九, 1876. 8. 29. ~ 1949. 6. 26)의 원래 이름은 김창암(金昌巖)이었는데, 1893년(18세) 동학에 입교하면서 김창수(金昌洙)로 바꿨고, 1912년(37세)에 김구(金龜)로 개명했다. '구' 자도 임시정부 시절 거북 구(龜)에서 아홉 구(九)로 바꿨다고 한다. 자(字)는 연하(蓮下),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구)안동 김씨 김순영(金淳永, 당시 24세), 현풍곽씨 곽양식(郭陽植)의 딸 곽낙원(당시 17세)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충렬공 김방경의 25대손이며, 익원공 김사형의 21대손이다. 김자점의 11대 방계 후손으로, 김자점의 옥사 당시 그의 11대조로 사과(司果)를 지낸 김대충(金大忠)이 화를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개성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해주로 피신해 왔다. 해주군 서쪽 80리에 있는 백운방 텃골, 팔봉산(八峰山) 양가봉(楊哥峰) 아래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김구의 선조들은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하여 양반의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행세하여 연명해 왔다.

김구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여운형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 이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 운동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 정부 내 노선 갈등 이후 일부 독립 운동가가 임시 정부를 이탈하고, 만주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다.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1931년에 독립 운동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 김구는 1949.6.26 안두희(安斗熙)에게 살해 당했다. 당일 김구의 수행비서 선우진이 암살범 안두희를 김구의 방으로 안내한 것이 11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고, 안내 후 2~3분이 채 못 되어 3층에서 총소리가 울렸으며, 총소리에 놀라 당시 비서였던 이풍식, 이국태가 뛰어 올라갔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다음 사람인 박동엽(독립운동가이자 대광고 교장)과 경비원 2명이 따라 올라갔을 때는 12시 40분경이었는데 김구가 이미 사망한 뒤였다고 한다.

- 김구의 암살 배후는 미궁이다. 안두희가 6.25 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국회 백범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소령, 김병삼 대위,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 민주당 김준연,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단장,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 소위 88구락부가 암살을 주도하고, 홍종만, 안두희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 후일 안두희는 1996.10.23 박기서씨의 정의의 몽둥이에 맞아죽었다. 박기서씨는 안두희를 처단하기로 결심한 후 부천시장의 그릇가게에 가서 홍두깨 비슷한 몽둥이(40Cm 크기)를 4천원 주고 사서 안두희 집으로 달려간 것이다. 박기서 씨는 누워 있는 안두희에게 장난감 권총을 겨누며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권총이 불을 뿜는다고 고함을 쳤다. 이어 준비해간 나일롱 끈으로 두 손을 뒤로 묶고 '정의봉'으로 사정없이 구타했다. 숨이 차면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내 마시면서 계속 두들겨 팼다. 이윽고 안두희는 욕된 인생을 마감했다.

박기서 씨는 안두희가 숨진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택시를 타고 신곡본동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한 후 경찰에 자수했다. 박기서 씨가 구속 기소되자, 사회 각계 인사들이 '백범 암살범 안두희 처단 박기서 의사 석방대책위원회'를 구성해 9,200명의 명의로 인천지방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다.박기서 씨는 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김대중 대통령의 3.1절 특사로 1년 4개월만에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