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태평양전쟁, 칠레와 볼리비아•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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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태평양 전쟁(스페인어: Guerra del Pacífico)은 1879년 2월부터 1883년 1월까지 약 4년에 걸쳐 볼리비아·페루 연합군이 칠레와 맞서 세 나라가 아타카마 사막의 초석 지대를 놓고 남동 태평양 일대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이 전쟁을 원래 태평양 전쟁(War of the Pacific)이라 불렀는데, 60년 뒤 1939년 1월 태평양을 무대로 하는 일본,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Pacific War), 즉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혼동되고 있다.
- 당시 배경
당시는 나폴레옹 전쟁 뒤 혼란중으로 스페인의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가 일제히 독립하고 신생 독립국들이 우후죽순 쏟아지면서 중남아메리카 정세는 혼란할 때이다. 직접적인 원인은 볼리비아의 태평양 연안 지역인 안토파가스타(Antofagasta) 문제였다. 이곳은 칠레-볼리비아 간 합의에 따라 볼리비아 영토였고, 구아노와 초석, 은 같은 중요 자원들이 많은 금싸라기 땅이자 볼리비아의 유일한 태평양 출구였다. 그러나 당시 남미 국가들이 다 그렇듯 모자란 인구로 개발이 어려웠고, 볼리비아는 이 지역 개발을 위해 칠레를 끌어들여, 1874년에 자국 내 칠레인 및 칠레 기업에 향후 25년간 무과세 혜택의 제공을 골자로 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1876년 볼리비아 내부의 군사 쿠데타와 뒤이은 경제혼란으로 돈줄이 궁하던 볼리비아는 1878년 안토파가스타 주의 칠레인 및 기업들에게 수출세를 부과했다. 이는 명백한 조약 위반이었고, 조약에 의거해 칠레인들이 세금납부를 거부하자 볼리비아 정부는 이들 자산에 압류조치를 폈다. 뒤이어 볼리비아가 안토파가스타와 수도를 잇는 철도를 개통, 안토파가스타 영유권을 굳히려 들자 칠레는 격분했다. 법적으로는 볼리비아 영토지만 개발은 사실상 다 칠레인이 했는데, 볼리비아가 개발만 다 시켜놓고 그대로 뺏어먹으려 한다는 인식이 커서였다. 더군다나 이 때 칠레도 경제가 나빠서 더욱 민감했다. 여기에 페루도 형제국이다시피 한 볼리비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두 나라는 칠레에 맞서는 비밀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1879년 2월 14일 칠레군이 볼리비아를 공격하여 안토파가스타 주를 강점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15년 전, 친차 제도 전쟁 당시 스페인에 맞선 동맹군끼리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세 나라의 병력은 페루 8,000여명, 볼리비아 3,100명, 칠레 2,500명 수준. 칠레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 전쟁상황
볼리비아는 별다른 해군력이 없었기 때문에 페루 해군이 칠레와 해전을 벌였는데, 이 지역은 사막과 산맥으로 이루어져 도로가 적어서 육상교통이 지극히 불편했으므로, 주요 거점은 주로 해안 가까이에 있었고 따라서 제해권이 있어야 지상군에게 원활히 보급을 할 수 있었다. 장갑함을 중심으로 전력을 강화해온 칠레 해군에 비해 함선 규모도 작고 수가 딸리는 페루 해군은 안가모스(Angamos) 해전(1879. 10. 8)에서 참패, 해군 사령관 미겔 그라우(Miguel Grau) 제독이 전사하고 기함마저 뺏겨 제해권을 잃었다. 이로써 칠레가 승기를 잡았다.
제해권을 장악한 칠레군은 본격적으로 북진을 개시했다. 볼리비아-페루 동맹군은 칠레군과의 연이은 지상전에서 모조리 패배했다. 이에 칠레군은 이듬해인 1880년에 안토파가스타 주 전역은 물론 페루의 타라파카(Tarapach)와 아리카(Arica) 두 주들을 모두 함락시켰고, 볼리비아군은 안데스 산맥 너머 본토로 쫓겨나며 사실상 전열에서 이탈했다. 그럼에도 페루가 항복할 조짐이 없자, 칠레는 지상군을 긁어모아 페루 본토를 침공했다. 1881년 1월 15일, 페루는 수도 리마로 가는 길목이자 최후방어선인 미라플로레스(Miraflores)에 패잔병과 예비군, 갓 징집한 신병에 용병까지 긁어모아 약 1만 명을 배치해 결사항전에 나섰으나 칠레군에게 끝내 패배하여 3천여명의 병사를 잃고 나머지는 와해되었다. 뒤이어 1월 17일 수도 리마가 결국 칠레군의 손에 함락되었고, 뒤이어 페루 해군마저 잔존 함정이 칠레 해군에 모조리 나포당해 항전불가상태에 빠지면서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
그러나 페루군은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저항을 계속했고, 볼리비아도 전투를 멈추지 않아 산발적인 교전이 이후 2년여간 이어졌다. 물론 전투가 지속될수록 페루와 볼리비아가 불리해졌고, 끝내 1883년 교전당사국들은 종전에 합의했다. 이렇게 1883년에는 칠레와 페루 사이에, 1884년에는 칠레와 볼리비아 사이의 평화협정이 맺어져 4년간의 전쟁이 끝났으나 사실상 최종 승자는 칠레였다.
- 볼리비아 입장
이 전쟁으로 볼리비아는 아타카마 사막 일대의 서부 연안 영토와 광산 개발권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고, 볼리비아는 1904년 칠레와 협정 영구화 조약으로 태평양 진출의 통로가 막힌 내륙국이 되었다. 이후 볼리비아는 끊임 없이 바다로 나가는 길을 내달라고 요구했다. 1956년 칠레와 볼리비아 외교장관은 칠레가 볼리비아의 티티카카호 사용권을 받고, 볼리비아에게 태평양 진출 길을 허용한다는데 합의했다. 하지만 페루가 반대하고 나섰다. 페루는 티티카카호를 공동소유하고 있는데, 두 나라가 일방적으로 칠레에 사용권을 내주기로 한데 불만을 품은 것이다. 그후 칠레가 볼리비아와 공동소유하고 았던 라우카 강의 수로를 일방적으로 변경하자 1962년 볼리비아는 칠레와 단교를 선언했다.
볼리비아에서 천연가스가 많이 생산되는데 이 천연가스를 미국에 수출하는 방법을 두고 정치적 논란이 되었다. 이 천연가스를 미국에 수출하려면 칠레에 빼앗긴 아타카마 사막을 통과하는 것이 빠른 방법이다. 친미파인 곤잘레스 산체스 데 로사다(Gonzalo Sánchez de Lozada) 대통령은 비용이 저렴하게 드는 이 방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볼리비아 야당은 이 방법보다는 멀고 험한 산지를 통과해야 하는 페루 통로를 주장했다. 과거 자신들의 땅이었던 아타카마 사막을 통과하며 칠레에 토지와 항구 시설에 대한 사용료를 내는 일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3년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서 칠레로 가는 파이프라인 건설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교통이 마비되고 도시의 다른 기능들도 마비되었다. 도시의 대부분의 상점과 사무실이 문을 닫았다. 라파스로 올라오는 주요 도로들이 시위대로 차단되었다. 정부가 이 시위를 막는 과정에서 수십명의 시위대가 목숨을 잃었다. 민중들의 분노로 결국 2003년 말 산체스는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도주했다.
2004년 볼리비아 의회는 도망간 전 산체스 대통령과 장관 15명을 살인 등의 혐의로 재판정에 세웠다. 볼리비아 정부는 산체스의 인도를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하고 있다. 역사적 앙금이 오래 가고 있는 것이다. 이후 볼리비아에 2006년 좌파 사회주의운동당의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가 대통령이 되면서 볼리바아는 칠레에 강경하게 돌아섰다. 2009년 2월 제정된 볼리비아 새 헌법은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 행사에 기초한 태평양으로의 출구 확보는 볼리비아의 항구적이고 불가분한 목표”라는 규정을 넣었다. 이어 2010년에 칠레와 다시 단교를 선언했다. 볼리비아는 바다는 없지만 해군은 있다. 5000명의 병력에 100여척의 함정과 30여 대의 항공기까지 갖추고 있다. 내륙국 볼리비아가 군함까지 보유할 수 있는 것은 티티카카호 때문이다. 페루와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티티카카호는 해발 3810m 고지대에 위치해 있지만 면적이 8300㎢로 부산(765㎢)의 10배가 넘는다. 볼리비아는 바다같은 티티카카호에 해군기지를 건설해놓고 정기적으로 훈련을 하고 있다.
- 칠레
칠레는 전쟁배상금으로 받은 금화만 2,000만 페소, 무엇보다 오늘날 국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싸라기 자원지대를 영토로 편입시켰다. 1973년 집권한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군사정권은 볼리비아와 관계개선을 추구해 이듬해 1974년 국교를 재개했다. 피노체트 정권은 볼리비아에 해양통로를 제공하기 위해 페루와의 국경에 3국 공동관리지역을 설치하자고 주장했지만, 페루가 반대했다. 현재 칠레 영토의 1/3에 해당하는 칠레 북부의 이 지역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주는 리튬, 구리 광산 등 자원의 보고이다.
전쟁이 끝난 지 140년이 넘었지만, 볼리비아와 페루는 평화협정으로 설정된 현재의 국경선은 전쟁 이후 승전국에게 유리한 불공정한 협정의 결과이므로 칠레에 지속적인 재협상 요구를 해왔고, 칠레가 이를 거부하자 국제사법재판소에 칠레를 각각 제소한 상황이다. 하지만 2018년 재판소 법관 15명중 12명이 칠레가 볼리비아가 요구한 주권 협상에 참여할 의무가 없다며 칠레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협상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