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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선포

nyd만물유심조 2022. 10. 10. 20:45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 12일, '조선'이 제국을 선포하여 세워진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대조선국의 대군주인 고종이 칭제건원하여 황제를 선포하고 국호를 '대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변경하였다. 즉 뿌리 자체는 조선 왕조에서 계속 이어졌다. 때문에 역사학자들도 대부분 대한제국을 조선과 별개의 나라가 아닌, 연속된 계승국으로 간주하고 있다.

임오군란 이후의 청나라의 간섭과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위시한 외세로 말미암아 열강 세력의 이권 침탈을 비롯한 국가의 자주성이 크게 위협받자 자주성을 띤 국가 수립을 염원하는 백성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져 갔다. 독립협회의 고종 환궁요구와 조선의 자주독립 주장에 힘입어 대한제국이 성립되게 이르렀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으로부터 지속적인 방해를 받았고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자 이후 외교권, 경찰권을 차례로 뺏기고 군대해산을 거쳐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멸망하였다.

- 추진과정
1897년(광무 원년) 2월 20일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그 해 8월 17일 광무(光武)란 연호를 쓰기 시작하고 10월 3일 황제 칭호 건의를 수락하였다. 고종은 자주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고 땅에 떨어진 국가의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반드시 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으며, 10월 12일 원구단(園丘團)에서 상제(上帝)님께 천제를 올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황제를 자칭하면서 즉위하였다.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각국은 대한제국을 직접으로, 간접으로 승인하였다. 그중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는 국가 원수가 직접 승인하고 축하하였으며 영국, 미국, 독일도 간접으로 승인하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열강 대부분은 대한제국의 성립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제위에 오른 고종은 그 직후인 11월 12일 미루었던 명성황후의 국장(國葬)을 치렀으며, 과거에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의 상징인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 건립에 추진하여 11월 20일에 완공하였다.

- 근대화 추진과 변화.
대한제국 시기에 급속도로 근대화가 추진됐다. 정부 기관과 제도를 개편하여 13도를 골자로 하는 지방행정도 개편되어 오늘날 대부분의 도와 시군의 구역과 명칭이 이때 탄생하였다. 외국자본에 각종 부설권과 광산개발권을 주고 세금을 부여하였고 도로망과 전기 등 기간시설을 구축하고 상공업을 진흥시켜 이전에 비하여 세수를 크게 늘렸다. 광무양전으로 경작지에만 국한되던 토지측량을 임야와 해안 등 모든 국토에 대해 호구조사 지질조사와 병행해 측량하여 종래의 토지결수를 늘리고 집세를 부과하였다. 서울 시내와 인천 간에는 전철이 다니며 대로변과 시가지가 정리되고 수많은 유럽풍의 근대 건축물이 들어섰다. 전기회사와 발전소를 설립하여 전신, 전화 통화가 가능해졌고 밤에는 가로등이 시내를 밝혔다.

복식도 크게 변화하여 1895년에 일본이 시행했던 1차 단발령은 실패한 반면 대한제국이 시행한 단발령은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행하였고, 중앙정부 관료들만 입던 서양식 복식도 지방관과 대중들에게 확대되었다. 상공업을 장려하여 한국인이 설립한 수많은 기업과 가게가 들어서고 많은 서양 문물이 전파된다. 오늘날의 많은 대학교 등 관립·사립학교와 각종 외국어·실업교육기관이 대폭으로 설립되어 근대식 교육이 시행되었고 공문서의 국문화 또는 국한문화와 함께 12개의 신문을 발행하였다. 대한제국 시기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과 군사력은 위협적이었고 그만큼 변화도 빨랐다. 광무개혁 이전에 방문했던 외국인 기자와 선교사들은 몇년 사이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고 평가할 만큼 급진적이었다.

식생활에서도 서양 문화가 많이 도입 되었다. 대한제국 곳곳에 경양식 식당들이 개업했고 여전히 밥, 국, 반찬으로 먹었지만 한국인들도 서양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실제로 서양 음식을 먹는 한국인들 사진이 찍히기도 하였다. 황제인 고종 광무제는 아예 궁전 내부에 카페를 만들어서 커피, 홍차, 디저트를 즐겨먹었고 수라상에도 사이다, 디저트, 커피, 홍차, 파스타, 스테이크, 돈까스 같은 서양 요리들이 차려졌다.

군사적으로도 많은 개혁을 진행하여 근대식 군대인 대한제국군이 탄생하였고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장교들을 양성하였으며 기관총, 서양식 대포 같은 최신무기들을 도입했고 비록 사기당했고 무장이 빈약했지만 양무호라는 순양함을 도입했으며 초계임무 수행이 가능한 광제호라는 등대순시선을 도입했다. 계급체계도 서양식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재정과 지지세력의 한계, 상업자본의 축적이나 금융자원의 부재 상태에서 외국 자본의 침투와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개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제국 치곤 정치체제는 전제군주제를 탈피하지 못했고 재정은 황실비자금인 내탕금을 통해 운영되는 비중이 컸다. 고종의 직권으로 정책의 추진력은 높았으나 일본의 지속적인 방해를 받았다. 1904년 1월 21일 고종은 국외에 중립을 선언했지만 2월 8일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인천, 원산, 마산에 상륙 후 서울을 점령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1904년 8월 22일 1차 한일협약으로 일본의 고문정치가 시작되며 자주적 개혁은 끝나고 일본의 개입을 받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