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푸미폰 국왕 서거
세계 최장수 재위 기록을 가진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이 10월13일(현지시간) 서거했다고 왕실 사무국이 밝혔다. 향년 88세.
왕실 사무국은 성명을 통해 "폐하께서 오늘 오후 3시52분 시리라즈 병원에서 영면했다"고 밝혔다.
푸미폰 국왕은 1946년 6월 9일부터 이날까지 70년 126일간 왕위를 유지해오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푸미폰 국왕은 형인 라마8세가 즉위 1년만에 암살당하자 1946년 6월 짜끄리 왕조의 라마9세로 즉위했다.긴 재위 기간 푸미폰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가난한 농촌을 찾아다니며 서민들과 가까이 했고, 저소득층 복지와 농촌개발사업을 많이 펼쳤다. 태국에는 작은 식당부터 공공장소에서까지 푸미폰 국왕과 왕비의 사진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모든 종류의 바트화 지폐에는 그의 사진이 새겨져 있다.
푸미폰은 태국 현대사의 고비고비마다 막강한 권위를 행사했다. 그는 1957년 군부 쿠데타를 승인하면서 정치 전면에 등장했고, 이후 이어진 군부 정권들과 줄다리기를 하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1973년 군부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과 맞섰을 때에는 군부정권을 해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9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수찐다 크라쁘라윤 당시 총리를 왕궁에 꿇어앉히고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며 훈계하던 모습은 국민들에게 깊이 각인돼 있다. 결국 수찐다가 망명하고 민주정부가 수립됐다. 국민들은 정치 위기 때마다 왕궁을 바라봤고, 결단을 내린 국왕을 존경했다.
그러나 국왕이 군부와 결탁해 권력을 유지하고, 태국의 민주주의를 왜곡시켰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절대왕정 국가였던 태국이 1932년 군부 쿠데타로 입헌군주국이 된 후 19차례나 쿠데타가 일어나 정부가 전복됐다. 푸미폰은 대부분의 쿠데타를 추인했다. 2000년대 들어 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몰아낸 장본인은 사실상 국왕이었다. 푸미폰은 2006년 탁신을 몰아낸 쿠데타를 승인했고, 지난 5월에도 탁신의 동생 잉락 친나왓 총리가 이끄는 정부를 뒤엎은 군부의 쿠데타를 닷새 만에 승인했다.
반민주적인 ‘왕실모독죄’도 비판을 받았다. 태국 형법에 따르면 국왕과 왕비, 왕세자 등을 모독하는 사람은 최대 징역 15년에 처해진다. 특히 5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쁘라윳 과도정부가 언론을 통제하고 반대세력을 숙청하는 데 왕실모독죄를 악용하자 국제앰네스티가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국왕 서거로 태국 정국은 소용돌이에 휩싸일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여년간 국왕의 건강이상설이 돌 때마다 태국 증시는 폭락했다. 왕비 근위대 출신으로 왕당파인 쁘라윳 총리의 지지기반이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군부에 쫓겨난 탁신 진영이 다시 들고 일어날 가능성도 높다.
푸미폰 국왕은 1950년 시리낏 왕비와 결혼한 후 슬하에 1남 3녀를 뒀다. 장남인 마하 와찌랄롱꼰(64) 왕세자는 왕위 계승 서열 1순이다. 그는 3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방탕한 생활로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대신 10대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천사 공주'라는 별명을 얻고 있는 마하 차끄리 시린톤(61) 공주의 인기는 높다.
왕위계승 과정이 순탄할지 알 수 없다. 태국에서는 국왕의 건강을 거론하는 것조차도 금기였고, 와찌랄롱꼰은 탁신에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세자의 도박 자금을 탁신이 댔다는 것이 위키리크스 문건으로 폭로돼 정치 스캔들로 비화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 마하 짜끄리 시린돈 공주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조심스레 나온다. 오빠인 왕세자와 달리 시린돈 공주는 군부와 보수파의 지지를 받고 있다. 만에 하나 군부가 시린돈 공주를 옹립하려 한다면 왕세자 세력과 충돌해 태국 정국이 혼돈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