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乙未事變)/명성황후 암살 사건(明成皇后暗殺事件)






1895년 (양력) 10월 8일 당시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일본군 공사관 수비대와 경관, 일본군 경성 수비대 일부, 일본인 낭인들이 경복궁에 무력으로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포함한 조선인 궁중 인사들을 집단 살해한 사건이다. 명성황후 암살 사건(明成皇后暗殺事件), 명성황후 시해 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이라 부르기도 한다. 당시에는 을미의 변(乙未之變) 또는 을미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이라고 불렀다.
•사건 전개와 영국영사의 보고문
10월 8일 새벽 일단의 일본인패들이 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을 납치하여 경복궁으로 향했다. 한편 일본인교관은 야간 훈련을 실시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군 훈련대를 경복궁까지 유인하였다. 계획이 개시된 것은 새벽 5시(일본측 자료는 5시 45분으로, 약 한시간 오차). 경복궁담을 넘어간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엄호하에 광화문을 열어 제쳤다.
일본군에 이어 일본인들이 호위한 대원군의 가마와 훈련대가 밀려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궁궐 시위대병사 8∼10명과 홍계훈(훈련대 연대장)이 희생되었다. 일본군의 습격은 북문으로부터도 있었다. 광화문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이미 북서쪽의 문(추성문), 북동쪽의 문(춘생문)을 통과한 별도의 일본군이 북쪽의 문(신무문)을 공격해 들어갔다.
경복궁에서는 숙위 중이던 시위대 교관 다이(William McEntyre Dye, 茶伊)와 연대장 현흥택의 지휘하에 비상 소집된 300~400명의 조선군 시위대가 저항하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곧 무너졌다. 이후 왕후의 거처에서 만행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사방의 출입구를 봉쇄하였다. 사복차림의 일본인이 현장을 지휘하였고, 일본군 장교(2명)가 이를 보조하였다. 주한영국영사 힐리어(Walter C. Hillier)는 사건의 현장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1895.10.11).
“건청궁의 앞뒷문을 통해 일본군의 엄호하에 침입한 민간인 복장의 일본인들은 한 무리의(조선군 복장을 한)군인들과 함께 일본군 장교와 사병들이 경비를 서 주었다. 그들은 곧바로 왕과 왕후의 처소로 돌진하여 몇몇은 왕과 왕태자의 측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왕후의 침실로 향하였다. 이 때 궁내에 있던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은 서둘러 왕후에게 급보를 전하였고, 왕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숨으려던 순간이었다. 그 때 흉도들이 달려 들어오자 이경직은 왕후를 보호하기 위해 두 팔을 벌려 가로막았다. 흉도들 중 하나가 왕후를 찾아내기 위해 왕후의 사진을 손에 지니고 있었던 데다, 그의 그러한 행동은 오히려 흉도들에게(왕후를 알아보게 하는) 용이한 단서가 되었다. 이경직은 내려친 칼날에 양팔목을 잘려 중상을 입고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었다. 왕후는 뜰 아래로 뛰쳐나갔지만 곧 붙잡혀 넘어뜨려졌다. 그 뒤 흉도들은 왕후의 가슴을 짓밟으며 일본도를 휘둘러 거듭 내려 쳤다. 실수가 없도록 확실히 해치우기 위해 그들은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몇몇 궁녀들까지 함께 살해하였다. 그 때 왕후의 의녀(女侍醫)가(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 손수건으로 왕후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한 둘의 시신이 숲에서 불태워 지고, 나머지는 궁궐밖으로 옮겨가 처리되었다”[주한영국영사의 보고문].
•지금까지 일본의 억지 주장.
일본은 사후 100년 넘는 동안 지금까지도 조선의 분쟁에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주장해 왔지만, 을미사변 사건 두 달 뒤에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작성하고 일왕이 결재한 보고서가 2005년 공개되었다.
을미사변의 범행은 당시 일본공사 미우라 일당이 저질렀지만, 그동안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 배후의 진정한 주동자는 미우라 직전에 공사를 지낸 이노우에 가오루를 비롯한 일본 정계의 최고위 원로(元老 : 겐로)들 및 이토 히로부미 총리를 비롯한 내각의 각료들이었다. 당시 을미사변 실행자들이 일본 정부의 실권자인 원로들에게 보호 받았는지는 그들의 사후 출세 가도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심지어 미우라는 재판을 받고 석방되자 일본 메이지 천황이 직접 시종을 보내 치하하기까지 했다.
일본은 기록을 조작하여 황후 시해 책임을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에게 돌리려 했지만, 범인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서양 각국에 알려졌다. 사건의 범행자들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당시의 목격자인 궁녀, 환관, 태자 이척 등이 증언한다. 또한 러시아인 건축기사였던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 시위대 지휘관이었던 미국인 윌리엄 다이 대령이 현장을 목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