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3선개헌을 아시나요?

nyd만물유심조 2021. 9. 13. 19:24







오늘 9월14일은 3선개헌을 1969년 제3공화국 국회에서 주전자 뚜껑으로 책상을 3번 두드려 통과시킨 날이다.
삼선개헌(三選改憲)은 1969년 박정희 정권이 정권 연장을 위하여 대통령의 3선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한 대한민국의 6번째 헌법개정이다.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안이 9월 14일 국회에서 여야 국회의원들을 협박 회유하여 변칙통과, 대학생들과 국민들의 반대를 억압하고 10월 17일 국민투표를 하여 확정된 결과 박정희는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 또 출마, 당선되어 유신체제와 장기집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제3공화국은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상당한 표차로 무난히 당선되기는 했지만 이것이 박정희의 마지막 임기라는 것은 변함 없었다. 이에 1968년경 윤치영 민주공화당 의장, 길재호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등이 3선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1969년 3선 개헌 추진은 본격화되어,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정부 여당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였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3선 개헌안을 반대하는 여당인 민주공화당 국회의원들을 협박하였다. 그리고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백남억 등 공화당의 반 김종필계 "4인방"도 3선 개헌안을 반대하는 민주공화당 국회의원들을 설득하였다. 그럼에도 정구영 전 총재를 비롯해 김용태, 예춘호, 양순직, 박종태, 김달수, 이만섭 등은 반대가 심하였다. 김종필도 처음에는 3선 개헌에 반대했으나 박정희의 거듭된 설득에 3선 개헌 찬성으로 돌아섰다. 김용태는 국민복지회 사건과 엮여서 중정에 끌려가 고문까지 당하였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요원들을 시켜 3선 개헌에 극렬하게 반대한 사람 중 한 명인 김영삼 신민당 국회의원에게 초산을 뿌려 살해하려고 하였다.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참조) 그리고 금품과 물품 살포하며 선거법 위반까지 한 판국에 정권까지 연장하겠답시고 여러 형태의 테러까지 감행하고 있다고 하니 당연히 야당을 중심으로 3선 개헌 반대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정권은 이에 대한 조치로 대학의 휴교 조치도 취했다. 그러나 8월 공화당 의원 119명과 신민당 의원 3명이 서명한 3선 개헌안이 발의되었고, 신민당의 반대는 격렬해졌으며 임시국회는 파국을 맞았고, 휴교 조치됐던 학교들은 개학하면서 다시 학생들의 데모가 시작되었다.

9월 8일 헌법개정안은 국회에 상정됐고 13일 표결을 선포했다. 하지만 1967년 치뤄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의해 구성된 국회에는 공화당이 의석의 2/3을 넘었고, 정족 수를 줄이기 위해서 당 해산까지 했던 야당에서 표결을 할 리가 없었다. 결국 야당은 단상을 점거하고 12시까지 계속 버티기 전략을 펴서 거의 저지 성공에 가까워졌다. 그렇게 자정이 넘어서 산회가 됐는데... 9월 14일 새벽 2시 직후 태평로 국회의사당 건너편에서 일이 벌어졌다. 이 당시 개헌을 지지하던 공화당 의원들은 반도호텔 등 태평로 호텔 곳곳에 숨어 있다가 별도의 신호를 받고 태평로 골목길로 조용히 국회 제3별관으로 가더니 거기서 자기들끼리 투표를 해버렸다. 공화당 의원들은 이효상 국회의장의 사회로 찬성 122, 반대 0표로 6분 만에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때 유명한 장면으로 이효상 국회의장이 개헌안 가결을 선언하려던 순간 의사봉이 없자 주전자 뚜껑으로 책상을 3번 두드렸다. 비밀리에 진행되던 이 사건이 외부에 알려진 것은 MBC 기자가 현장에서 터뜨린 특종 기사 덕분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시점은 MBC TV가 개국한 지 한 달 남짓 되던 시절이었다) 야당은 해당 개헌안이 무효라고 주장하였고, 학생들의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는 무시되고 10월 17일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그 결과 총 유권자의 77.1% 참여에 65.1% 찬성을 얻어 가결이 되었다.

한편 개헌은 막지도 못하고 테러만 당하고, 해산 당해서 상처만 입은 신민당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진오 총재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유진산이 총재가 되어 박정희는 자신이 무난하게 대통령이 될 줄 알았지만 다른 대권 후보 즉, 김대중 후보가 박정희를 상대하면서 박빙의 승부가 펼쳐졌다. 즉 3선 개헌으로 박정희는 1971년 4월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다시 출마하여 당선(53.2%)은 되었으나 김대중 후보(45.3%)와의 예상외 대접전을 벌이며 체면을 구겼고, 이어서 치러진 8대 총선에서 공화당 의석이 개헌선 아래로 떨어지고 신민당이 의석을 대폭 늘리며 약진하자 1972년 10월, 해괴한 독재논리로 10월 유신이라는 악법을 통해 본격적인 극단적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결국 1979년 10월26일 저녁 궁정동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권총에 죽을 때까지 집권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