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인간성:한국 왜덕산의 일본인 무덤, 와덕밭
422년 전인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왜군 수군 300여 척을 격퇴시킨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명량해협(鳴梁海峽)은 전남 해남군 화원반도(花源半島)와 진도 사이에 있다. 영화 '명량'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지만 육지인 해남과 섬인 진도 사이에 자리한 길이 1.5㎞의 좁은 바다다. 폭이 가장 좁은 곳은 290m에 불과하다.
밀물 때는 남해의 바닷물이 한꺼번에 해협을 통과하면서 서해로 빠져나가 물 속도가 매우 빠르고 물소리도 커 명량(물소리가 우는 것처럼 요란하다)이라 불렸다. 순우리말로는 울돌목이다. '물이 울면서 돌아나가는 목'이라는 의미다. 진도에서는 울두목이라고 한다. 울두나 울도나 모두 동물 목에 있는 '울대'에서 나온 말로 진도·해남 사람들은 명량해협을 '바다가 소리를 내는' 울대로 여겼다는 것이다.
1597년 음력 9월 16일 이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에 격퇴당한 왜군들 시신이 진도 해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명량대첩에서 전사한 일본 수군은 대략 2만 4000여 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의 진도대교와 가까운 군내면 둔전리, 고군면 오류리, 연동리, 내산리, 원포리, 벌포리 해변에서는 물이 빠져나가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왜군들의 시신이 개펄에서 드러났다.
진도 사람들은 비록 자신들에게 씻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적군이라 할지라도 넋을 위로해줘야 한다며 고군면 내산리 내동마을에 있는 왜덕산(倭德山)에 시신들을 안장해주었다고 한다.
마산리, 내동리, 오산리, 지수리, 지막리, 하율리, 황조리 등 7개 마을 사람들이 100여 구 왜군의 시신을 수습해 일본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잘 묻어주었다고 한다. 우리를 도륙한 원수들이지만 비록 영이나마 고향을 생각하며 잠들라는 덕을 베풀어줬다고 해서 '왜덕산'이란 이름을 짓게 됐다고 한다.
왜덕산의 존재는 2006년 한 일본인 학자를 통해 일본에도 알려진다. 주인공은 일본 수군(水軍) 연구자인 히구마 다케요시 히로시마수도대학 사회학과 교수. 그는 진도 답사를 하던 중 왜덕산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일본으로 돌아가 명량해전 때 일본 측 왜장이던 해적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의 고향 에히메현 이마바리시(市) 지역 신문에 왜덕산에 대한 글을 투고한다.
인구 8만 정도의 소도시인 이곳에는 구루시마와 명량해전에서 함께 싸운 장수들의 후손이 아직도 많이 사는데 구루시마는 죽었지만 살아 돌아간 장수들은 도요토미로부터 수만 석의 농지를 하사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히구마 교수는 이마바리 사람들은 조상 상당수가 명량해전에서 목숨을 잃은 것까지는 알고 있었으나 조선 사람들이 조상들의 시신을 수습해 묘를 만들어주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글을 읽은 후손들은 당장 한국으로 달려와 2006년 8월 15일 왜덕산에서 400여 년 만에 조상에 대한 위령제를 지냈다. 이듬해에는 왜덕산 이야기를 처음 들려준 이기수 옹 부부를 이마바리로 직접 초청하기도 했다.
조성된 취지와 목적으로 따지자면 왜덕산은 교토 코 무덤과는 정반대다. 근본적으로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일본인에게 조선인의 너그러움을 알려주는 역사적 장소다. 한일 간 앙금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전쟁의 부질없음과 참혹함을 일깨워주는 교훈의 장소이기도 하다.
한국의 진도인들은 '왜덕산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매년 진도에서 평화제를 열어왔고 이것이 교토 코 무덤 위령제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왜덕산은 우리를 참혹하게 도륙한 적을 원수가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과 생명으로 품은 휴머니즘의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