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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인간성:일본에 있는 한국인 코 무덤의 진실

nyd만물유심조 2019. 10. 22. 22:42

 

일본 도요쿠니 신사 근처에는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유적지가 하나 있다. 신사를 나와 서쪽으로 대로를 따라 100여 m쯤 걸어 내려오면 조용한 주택가 한가운데에서 만나게 되는 커다란 봉분이 바로 그것이다. 

 

봉분 꼭대기에는 돌로 된 오륜 석탑이 마치 무덤 전체를 짓누르기라도 하듯 서 있는데 도요토미 무덤 위에 놓인 것과 똑같은 크기와 모양이다. 얼핏 보면 도요토미 일족이 묻힌 곳인가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 어떻게 이렇게 큰 무덤이 주택가 한가운데 있다. 

 

무덤은 다름 아닌 정유재란 때 왜군이 베어온 조선인의 코가 묻혀 있는 '코 무덤'이다. 일본어와 함께 한글도 병기된 입간판에 무덤의 유래가 자세히 설명돼 있다. 

 

‘16세기 말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 진출의 야심을 품고 한반도를 침공한 이른바 분로쿠(文祿) 게이초(慶長)의 역(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일본식 명칭 ·1592~1598)과 관련된 유적이다. 히데요시 휘하 무장들은 예부터 전공(戰功)의 표지이던 적군의 목 대신 조선 군민 남녀의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에 가지고 돌아왔다. 이러한 전리품은 히데요시 명에 따라 이곳에 매장돼 공양 의식이 거행됐다고 한다. 무덤 위 오륜 석탑은 무덤이 축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교토시 2003년 3월).' 

 

정유재란을 일으킨 도요토미는 조·명 연합군의 반격으로 전황이 교착에 빠지자 전투를 독려하고자 전리품으로 조선인의 코를 베어오라고 명령한다. 코 무덤과 관련해서는 역사 속 증언이 많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강항은 '간양록'에서 "히데요시가 모든 장수에게 명하기를 사람의 귀는 둘이지만 코는 하나이니 마땅히 조선 사람의 코를 베어 머리를 대신하는 것이 좋겠다. 한 사람이 한 되씩으로 하되 소금에 절여 나에게 보내라. 코의 수효가 채워진 이후에야 생포로 인정하겠다"고 기술했다. 사람의 목보다는 코가 부피로나 무게로 훨씬 효과적이라는 발상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왜군은 전과를 올리고자 군·민 남녀노소는 물론 갓 태어난 어린아이까지 마구잡이로 코를 베어갔다고 한다. 조선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해 악명이 높던 가토 기요마사는 '청정고려진각서(淸正高麗陣覺書)'에서 "일본인 한 사람당 조선인의 코가 세 개씩 할당됐다. 그 코를 고려(조선)에서 검사관이 검사한 뒤에 큰 통에 넣어 소금에 절여 일본에 보냈다"고 전한다. 

 

일본군 종군 승려 경념(慶念)의 기록은 당시의 참혹함을 이렇게 전한다. 

"역사상 이 전쟁처럼 슬픈 것은 없다. 일본 병사들이 가는 곳마다 살육을 일삼았고 불을 지르니 그 연기가 고을마다 가득했다. 조선 사람은 어린이부터 부녀자까지 코를 잘라 대바구니에 담았고 병사들은 피투성이가 된 바구니를 허리춤에 달고 싸웠다."(2012 성기중 논문, '일본에 축조된 비총의 의도와 대응책 연구' 중에서 재인용) 

 

코 무덤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이의 코가 묻힌 것일까. '교토의 귀무덤에 대한 일고찰'(노성환·2009) 중 일부를 인용한다. 

"일본 측 기록인 '조선물어(朝鮮物語)'에는 '정유재란 당시 조선 사람 코 18만5738개, 명군 코 2만9014개 등 모두 21만4752개의 코가 일본으로 보내졌다. (…) '대일본고문서'(1925)에 나온 요시가와 집안만 하더라도 1597년 9월 1일부터 10월 9일까지 40일도 안 되는 기간에 3만1000여 명의 코를 베었다고 한다. 역사학자 이진희는 '한국과 일본문화'(1982)에서 '교토 코 무덤에 묻혀있는 조선인들 코 숫자를 약 5만 개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재정은 '교토에서 본 한일통사'(2007)에서 '적어도 10만여 명의 조선인의 귀와 코가 잘려나갔을 것'으로 추정했다. (…) 호리 교안이 쓴 '조선정벌기'에는 '(왜군들은) 조선에서 자른 코와 귀를 수레에 싣고 오사카 후시미 라큐추(교토)를 지나 여러 사람들에게 보였다'고 했다. (…) 이수광(1563~1628)은 '지봉유설'(1615)에서 '이때 우리나라 사람 중에 코 없이 살던 사람이 많았다'고 전한다."

 

-코 무덤이 귀 무덤 된 얍삽한 일인들의 사기술책

코 무덤은 한자로 비총(鼻塚)인데 교토 무덤 앞 입간판에는 귀 무덤이란 뜻의 이총(耳塚)이라고 적혀 있어 궁금해 찾아보니 사연이 있었다. 

 

정유재란 후 도요토미가 죽고 새 통치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등장한 에도 막부가 조선과 통신사 외교를 시작하고 주자학으로 일본의 통치철학을 수립하는 데 기여한 유학자 하야시 라잔이 '본디 이 무덤은 코만 묻혔는데 조선통신사들의 숙소가 이곳과 가까운 곳이어서 그들에게 혐오감을 덜 주기 위해 코보다 귀가 나을 것 같아 이총(귀 무덤)으로 바꾸어 불렀다'는 것이다.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초기까지 출판된 교토 안내서 대부분에도 귀 무덤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해 이제는 그게 일반 명칭이 됐다고 한다. 

 

경술국치 직전인 1909년 도쿄대 호시노 히사시 박사가 '교토 무덤은 코 무덤이지 귀 무덤이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으며 1997년 9월 28일 교토에서 열린 코 무덤 조성 400주년 기념 학술 토론회에서 이와 관련한 각종 사료가 공개되기도 했다. 

 

나카오 히로시 교토조형예술대 명예교수는 토론회에서 '깃가와가문서(吉川家文書)'와 '나베지마가문서(鍋島家文書)'를 공개하며 코 영수증은 있으나 귀 영수증은 한 장도 없는 것으로 미뤄 코 무덤이 확실하다면서 도요토미의 명령도 코를 베라는 것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고 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한일 연구자들은 코의 숫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으나 모두 귀 무덤이 아니라 코 무덤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한다(노성환, '교토의 귀무덤에 대한 일고찰').

 

20세기에 들어서서 서양인들이 코 무덤의 잔학성에 충격을 받아 철거를 요구한 적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1920년경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크로아티아 부부가 조선과 중국 등을 방문하는 도중에 교토의 비총을 보고 충격을 받아 당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편지를 보내 철거를 요구한 적이 있다.(성기중, '일본에 축조된 비총의 의도와 대응책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