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 의사 의거 97주년 기념식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남대문역(현 서울역). 해군 제복을 입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굉음이 울려퍼졌다. 마차 뒤쪽 7보쯤에서 폭탄이 터졌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사이토는 다급히 빠져나갔고 총독부 관리 등 3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폭탄을 던진 주인공은 백발이 성성한 64세(당시) 강우규 의사다.
사단법인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와 평안남도 덕천군민회는 9월2일 오전 서울역 광장에서 ‘강우규 의사 의거 제97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행사에는 윤종오 서울남부보훈지청장, 박유철 광복회장 등 80명이 참석했다. 이날 동상 앞에는 기념 화환들이 즐비했고 박근혜 대통령도 꽃을 보내왔다.
안중근 의사에 이어 의거한 강우규 의사는 1855년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방의술을 배워 재산을 모은 그는 사립학교에서 신학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10년 8월 28일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하는 ‘경술국치’를 맞았고 강우규 의사는 독립운동을 결심했다.
이후 1919년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나 종전보다 거센 만세시위가 번져나갔다. 이에 일제는 무력으로 통치하기 힘들다고 결론내리고 기존의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꿔나갔다. 이때 새롭게 임명된 총독이 바로 사이토 마코토다.
거사를 치르기 5일 전 강우규 의사는 남대문(현 서울역) 역을 사전 답사했다. 그는 신문에서 본 사이토 사진을 품에 지니며 틈틈이 얼굴을 익혔다. 마침내 거사 날이 밝아왔고 강 의사는 폭탄을 명주 수건에 싸서 허리에 단단히 맸다. 또 그 위에는두루마기를 입고 쉽게 폭탄을 꺼낼 수 있도록 준비했다. 오후 5시 행사를 마친 사이토 총독이 등장했고 그는 옆쪽 인력거 하치장 뒤쪽에서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거사를 치른 강우규 의사는 보름이 지난 9월 17일 16일 만에 순사 김태석에게 밀고로 붙잡혔다. 법원에서 최종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1920년 11월 29일 생을 마감하기 전 일본 순사가 마지막 감상을 묻는 말에 다음의 시를 읊었다.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강우규 의사 의거 기념식’은 2011년 동상이 세워진 뒤 매년 9월 2일 서울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동상이 세워지기 전에는 서울 백범 기념관 등에서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