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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신분, 양인(良人•자유민)과 천인(賤人•비자유민)뿐이나 배경중심 특혜사회

nyd만물유심조 2019. 6. 30. 10:14

 

 

 

 

조선시대 양반은 과거시험를 통해 신분이 결정되는 시스템이 공정하다고 생각했고 자부심도 있었다. 사실 동시대의 유럽 등과 비교해도 공정한 선발시스템이자 신분 이동의 사다리이긴 했다. 그 사다리를 치운 건 대단한 부정부패가 아니었다. 그 이면에 작동하는 각종 '특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서 생겨난 누적된 결과로서 배경중심, 즉 특혜가 많은 사회였다고 할 수있다.

 

따라서 조선은 배경이 중심되는 사회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지연, 혈연, 학연을 따지는 한국 특유의 문화가 조선시대의 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초기만 해도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폭넓게 존재했다. 신분 제도가 단순했기 때문이다.

 

건국 후 채택된 신분제는 양천제이다. 중국 수ㆍ당 시대에 확립된 국가 운용시스템인데 이에 따르면 국가에는 양인(良人ㆍ자유민)과 천인(賤人ㆍ비자유민)이라는 2대 신분만 존재할 뿐이다. 양인은 노비를 제외한 전부를 가리킨다. 학계에선 조선 초 노비의 비율을 30~40% 정도로 추정한다. 즉, 최소한 절반 이상의 국민이 과거도 보고 고관도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양반은 동반(東班ㆍ문관)과 서반(西班ㆍ무관)을 합쳐 부른 말이었다. 문·무반이라는 용어 자체가 실력 사회를 지향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경종(976년) 때인데 이전까지 혈통을 중시하던 골품제의 전통이 무너지고, 혈통뿐 아니라 능력도 중시하는 관료제가 수립되면서 탄생한 말이다.

 

즉 양반이라는 건 신분이 아니라 ‘관료 집단’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였다. 따라서 양반의 대립 개념은 상놈ㆍ천민이 아니라 무직자였다. 당시엔 서인(庶人) 또는 백성(百姓)으로 불렸다. 출신이 양인이라도 관직에 오르면 양반으로 불렸던 셈이다.

 

물론 양인 내부에서도 비공식적인 서열이 존재했다. 다만 서열은 혈통이 아니라 직업의 귀천에 따라 결정됐다. 당시의 양인의 서열은 ①관원 ②고관 자제나 생원ㆍ진사, 서리 ③ 농업에 종사하는 양인 ④ 상공인으로 나뉘었다.

그러니까 실제로 존재한 신분이라기보다 당시 인식에 따른 사회적 계층 정도였다. 가장 숫자가 많은 것은 ③번 그룹이었다. 조선 정부는 양인에게 세금을 거두고 군역(軍役)을 맡기는 대신 사환권(仕宦權), 즉 관료로 임용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따라서 ③번 그룹은 ①번과 ②번으로의 진출을 노리는 대기자이기도 했다. 현재의 일반 국민과 연결지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②번 그룹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특징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계층이다. 당시엔 ‘문음(門蔭)’이라고 해서 유력 가문에 대한 혜택이 있었는데, 이를 통해 고관의 자제들은 사실상 특별 전형을 통해 서리(胥吏)로 임명될 수 있었다. 서리는 지방 관청에서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직이다. 말하자면 아버지를 잘 두면 쉽게 공공기관에 취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서리는 조선시대엔 그리 높게 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고관 자제들은 어떻게든 과거에 급제해 벼슬에 나가려고 했다.

 

④그룹도 노비가 아니고 엄연히 과거를 치를 수 있는 양인이지만 6~9급의 기술직이나 무관으로 취업 제한을 받았다. 그래도 조선 세조 대까지는 기술직이나 무관이 무시되지 않았기에 이들도 엄연히 양반으로 대우받았다.

 

이렇게 각 신분 안에서 계층 구별은 집안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에 따른 성취였고, 이러한 신분 이동의 개방성은 조선 초기의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결속을 가져다준 조건이었다. 이처럼 개방성을 보장해준 것은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 국가의 성공 여부는 양인층이 세금과 군역(軍役)에 얼마나 활발하게 참여하는지에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신분의 사다리

양천제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성종 대다.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들이 대거 중앙 관료로 진출했는데, 성리학적 지식으로 무장된 이들은 자부심도 높았고, 자신들이 중심이 돼 나라를 바꿔야 한다는 사명감도 강했다.

이에 따라 기술직 양반을 중인 신분으로 격하시키고, 자신들처럼 문사적 기능을 담당하는 계층은 사족(士族)이고 나머지는 서족(庶族)이라며 차등을 두기 시작했다. 고위직으로의 진출도 사족이 독점하는 등 계층간 이동이 폐쇄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양반은 사족을 가리키는 단어가 됐고, 서족은 중인이나 노비와 동급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이들을 묶어 평범하다는 의미로 ‘상놈(常漢)이라고 부르게 됐다.

 

결국 훈구파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사림이 조정을 장악한 명종 5년(1550년)엔 아예 사족에 대한 정의를 법령으로 지정한다. “친가나 외가에서 4조(아버지~고조부) 내외에서 한쪽이라도 과거나 음서로 정6품 이상 진출한 관료를 배출한 가문의 후손이나 현재 생원이나 진사”는 사족이 됐는데 이전까지 관념적으로 통용되던 사회적 계층을 법적으로 공인해 준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③번 그룹이 과거를 통해 관직으로 진출해 신분을 상승시킬 기회는 열려 있었다. 이것마저 무너진 것은 연산군 대였다.

연산군 재임기에 왕실 및 중앙 재정의 지출이 급증하면서 정부의 만성적인 적자가 심화했다. 정부는 이를 메우기 위해 각종 세금을 대거 증액했는데 경제 기반이 취약한 일반 양인층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때 상당수는 세금 납부와 군역을 지는 대신 차라리 국가 기관이나 유력층의 노비로 편입하는 길을 택했고, 이에 따라 노비층이 많이 늘어났다. 반면 양인층 몰락이 가속화되고 노비가 늘어나면서 국가 기관이나 유력층의 경제력은 더 늘어나는 역설적 상황도 나타났다.

 

과거 준비에 전념할 수 있는 특권

이런 상황에서 안정적으로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특권이 된다. 당장 세금과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양인층에겐 학업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사대부들은 겉으로는 물욕에 거리를 두고 참된 도를 깨우치라고 말하면서도 자신들은 경제적 기반을 증진하는 데 주력한다. 전략적 혼인관계로 재산을 불린다든지, 자신의 노비를 양인과 결혼시켜 그사이에 낳은 자녀를 노비로 확보하는 ’우생학적‘ 방법까지 고안한다.

 

실제로 이정수·김희호 교수는 1590년부터 1900년까지 영호남의 여덟 집안의 전답매매 내역 1810건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이 기간 양반층의 토지는 약 47%가 증가했지만 중인·상민·노비는 30~80%가량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많은 유력 양반 집안은 거대 재산을 축적하는데, 퇴계 이황의 경우엔 36만 3500평의 토지와 367명(노 203명, 비 164명)의 노비를 둔다.

 

당시 생계 걱정 없이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던 가문의 평균 재산은 전답 300~500두락(약 3만평)과 노비 100여명이었다는 연구도 있다. 능력만 있으면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었던 조선 초기의 건강성은 거세돼 버린 것이다.

 

조선 초기,중기,후기

조선 전기에는 신분을 良賤으로 구분한다. 양인에는 직업적인 문무관료를 뜻하는 양반과 서얼,향리,기술관의 중인과 농민,상공업자의 상민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천인으로는 노비, 백정, 광대, 무당, 창기, 승려가 있다.

 

조선 중기에는 반상(班常)제가 확립된 시기로 양반과 중인 상민 천민의 4계층이 확립된다. 양반은 문무관료자격이 있는 고급신분과 사림(士林)의 성장에 따라 유교적 관념이 강조되면서 서얼에게 일정한 제한을 가하고, 유학을 배우지 않은 기술직 종사자들의 지위가 낮아져 중인(中人) 계급이 위축된다. 또한 지주전호제의 확산으로 농민이 소작농이나 노비로 전락함으로서 4계층의 분화와 더불어 양반과 상민이 구분되는 시기이다.

 

조선 후기는 4신분의 동요가 일어나는 시기이다. 양반이 70%이상 늘어나며 신분적으로도 양반층내에서 몰락하거나, 납속, 족보구입으로 신분상승이 많았던 시기이나, 상대적으로 상민(28%)과 노비(2%)가 줄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