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인터넷 산업의 오랜 기반인 망 중립성(net neutrality) 원칙을 12월14일 폐기했다. 망 중립성 원칙은 인터넷을 전기·수도와 같은 공공 서비스로 간주해 KT 같은 통신 사업자가 네이버 등 인터넷 기업의 통신망 접속을 차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터넷 종주국 미국이 인터넷 산업을 지배해온 대(大)원칙을 폐기함에 따라 국내 통신 업계에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전체 회의를 열고 인터넷 통신망을 공공재(公共財)로 간주해온 망 중립성을 폐지했다고 뉴욕타임스 등 현지 언론이 밝혔다. 이에 따라 버라이즌·AT&T 등 미국 통신 업체들은 과도한 데이터 사용을 유발하는 유튜브·페이스북·넷플릭스 등 글로벌 인터넷·콘텐츠 기업에 별도 비용을 요구하거나, 데이터 속도를 늦추는 차별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사용자가 몰리는 특정 앱(응용프로그램) 접속에 제한을 줄 수도 있다.
국내 통신 업계와 인터넷 기업들은 그동안 망 중립성을 둘러싸고 계속 갈등을 빚어왔다. 예컨대 구글 유튜브의 올 9월 국내 동영상 점유율(시간 기준·코리안클릭 집계)이 72.8%에 이르는 데에도 망 사용료를 내지 않는 데 대해 국내 통신 업체들은 물론, 국내 인터넷 업체들도 반발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페이스북이 SK브로드밴드에 인터넷 통신망 확충을 요구하면서도 망 중립성을 내세워 비용 분담을 거절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번 망 중립성 폐지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곳은 구글·아마존·넷플릭스 등 미국의 초대형 정보기술(IT) 기업들이다. 넷플릭스나 페이스북 같은 데이터 사용량이 많은 서비스는 접속 속도가 크게 떨어질 수 있다. 통신망 사업자인 버라이즌은 넷플릭스와 비슷한 스트리밍 자회사 파이오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론대로라면 이들 통신망 사업자가 망을 많이 차지하는 경쟁사 트래픽을 아예 차단한 뒤 추가 요금을 내게 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현재 월정액을 내고 인터넷을 쓰는 소비자들도 예전처럼 인터넷 사용량에 따라 요금을 내야 하는 ‘인터넷 종량제’로 회귀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무료로 쓸 수 있는 구글과 페이스북도 결국 ‘헤비 유저’들을 위주로 요금을 내라고 할 수도 있다.
통신 업계 관계자는 "통신 요금 인하 압박으로 투자 여력은 주는 데 인터넷 데이터양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이터 증가 속도에 맞춰 인터넷 업체들도 망(網)에 대한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인터넷기업협회 관계자는 "대형 기업들은 통신 업체가 요구하는 망 사용 비용을 추가로 부담할 여유가 있지만,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은 버거운 게 현실"이라며 "스타트업이 새로운 서비스로 혁신을 시도하는 힘이 약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는 이에 대해 "2011년에 만들어진 망 중립성 가이드라인에 당장 큰 변화는 없겠지만, 미국 시장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신 전문가들은 망 중립성 원칙을 고속도로와 그 위 차량들에 종종 비유한다. 망 중립성 원칙을 지키는 것은 차량에 비유되는 포털·동영상 등 서비스 사업자들이 모두 똑같은 속도와 품질로 서비스를 할 수 있게 고속도로를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번 미국에서처럼 망 중립성 원칙이 폐지되면 고속도로에 비유되는 통신망 사업자들은 차량(서비스 사업자)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고속도로와 저속도로를 차별해 제공할 수 있게 된다.
미국에서 망 중립성 원칙은 첨예한 정치적 갈등의 상징이다. 이번에 망 중립성 원칙 폐지를 의결한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한국의 방송통신위원회와도 같은 곳이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취임한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은 대표적인 망 중립성 반대론자다. 파이는 망 중립성 폐지로 수혜를 보게 된 통신망 사업자 버라이즌 출신이기도 하다.
파이는 “통신 사업자들이 자본주의 시장 원칙에 따라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통신사가 망 중립성 폐지로 얻게 된 이익은 차세대 인프라 투자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망 중립성 폐지도 결국 ‘트럼프의 오바마 지우기’ 대책의 일환일 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의 망 중립성 폐지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페이스북·구글 등 글로벌 IT 기업들이 국내에서도 가장 먼저 서비스 정책을 바꿀 가능성이 있다. 유튜브처럼 트래픽을 많이 쓰는 서비스는 인터넷 요금과 별개로 추가요금을 내거나 통신망 사업자들이 설치한 광고를 봐야 할 수도 있다. 네이버·다음 같은 국내 사업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한편 국내 통신망 사업자들은 공식적인 입장은 내놓고 있지 않지만 미국의 이 같은 결정에 찬성하는 분위기다. 한 통신업체 관계자는 “네트워크가 고도화될수록 소비자들에게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며 “합리적으로 망 사용을 분담하게 되면 궁극적으로는 소비자들에게 이익이 돌아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한국 정부는 미국 FCC의 결정이 당장 한국에 미칠 영향은 크지 않다고 판단한다. 유튜브 등 미국 서비스도 한국 시장에서는 국내 통신망을 이용하기 때문에 서비스 이용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미국의 망 중립성 원칙 폐지는 일종의 패러다임 변화이기 때문에 중장기적으로 여러 분야에서 큰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판단된다. 전문가들은 망 사업자들이 차세대 인터넷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됨으로써 이들이 서비스와 광고 시장을 좌지우지할 가능성이 커질수도 있고 데이터를 압축·절약해 유통시킬 수 있는 ‘데이터 압축 기술’ 등이 중요해지면서 메모리·반도체 산업도 장기적으로 영향을 받게 될 것으로 예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