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일본에게서 독립하여 국권을 회복한 것을 기념하는 날.
제2차 세계 대전은 1943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점차 연합군 측에 유리하게 되어, 그해 11월 말에 미국·영국·중화민국 3국은 소위 카이로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1945년 5월에 나치 독일이 항복하였고, 8월 8일에는 미국과 영국, 소비에트 연방이 모여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즉 독일이 1945년 5월에 항복하자 일본의 전력이 급강하게 약해졌고 모든물자를 전쟁용으로 바꾸었다.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며 압박을 가하고 그동안 8월1일에 조립된 핵폭탄을 미국이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번째 핵폭탄을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 또다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내부에서는 이미 항복을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세번째 8월 13일과 15일에 또 한번 핵 폭탄을 떨어뜨릴 준비가 완료된 상태였으며 두개중 한개를 도쿄에 떨어뜨리기를 원했었으나 8월 10일 포츠담 회담이 선언되어서 중단되었다. 8월 14일에 항복을 위한 협정서에 사인을 하고 전세계에 일본의 항복을 알려 8월 15일 드디어 일본의 패망과 함께 대한민국의 광복, 해방의 날이 되었다.
당일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히로히토 덴노의 항복방송을 들은 군중들이 그날 바로 태극기를 들고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항복 선언 순간 바로 그러한 모습이 조성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날 중대 발표가 있으니 조선인들은 경청하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그러나 당시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고, 덴노의 항복 발표 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어려운 난해한 한자어가 섞여 있었는데다가, 이게 그 당시 쓰던 일본어도 아니고 문어체(文語體)로 나왔기 때문에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결정적으로 히로히토는 전쟁을 끝낸다는 내용의 종전만을 언급했을뿐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위 방송을 전부 이해하는 조선인이 있었다 하더라도 종전이 당장 조선의 일제강점이 끝나고 광복을 뜻한다는 것을 알기는 어려웠다.
광복이 되었다고는 해도 일본군의 압력과 감시가 하루만에 풀릴리는 없어, 8월 15일 당일은 조용히 지나갔다. 게다가 광복 소식이 퍼져도 언론 통제로 계속 일본군이 연승한다는 소식만 듣고 있던 조선에서는 뜬금없이 일본의 패망이라는 사실 자체가 전혀 기존의 보도와 맞지 않는 헛소문처럼 들리기도 했다고 하며, 워낙 긴 일제강점기를 겪은 조선에서는 '광복'이라는 관념 자체가 잘 와닿지 않는 상황이었다.
1910년부터 일제에 의해 35~6년간 살다보니 당시 학생들은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자 우리나라가 망했는데 왜 만세를 부르지 라며 굉장히 의아해 했다고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 35년을 거치고 3.1 운동 이후로 태극기를 모조리 압수당한지 20년이 넘게 지난 상황이었다. 당시 최고 지식인 중 하나였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마저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노인들이 어렴풋한 기억으로 태극기를 그리고 청년층 아래로는 생전 처음 태극기를 보는 상황이었다고. 군중들이 환호하는 사진의 태극기 중엔 태극이나 사괘의 배치 등이 틀린 깃발도 발견할 수 있다. 여담으로 일장기의 모양이 덧칠해 태극기를 만들기 사실 적절했기 때문에 급하게 일장기를 커스터마이즈하여 아래쪽을 먹칠하고 사괘를 그려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실물은 많이 전하지 않아서, 떡밥에만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