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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근대로 점차 이동..

nyd만물유심조 2017. 7. 27. 07:39

 

 

 

김홍집

 

 

갑오개혁(甲午改革)은 1894년 7월 27일(음력 6월 25일)[1]부터 1895년 7월 6일(음력 윤5월 14일)[2]까지 조선 정부에서 전개한 제도 개혁을 말한다. 10년 전 갑신정변의 실패 후 망명했던 개화파들이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위세를 업고 돌아와 추진한 일본식 개혁으로서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불렸다.

 

내각의 변화에 따라 제1차 갑오개혁과 제2차 갑오개혁으로 세분하며, 이후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주요 내용은 신분제(노비제)의 폐지, 은본위제, 조세의 금납 통일, 인신 매매 금지,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 폐지 등이다.

 

갑오개혁은 봉건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조선 사회 내부의 개혁적 요구를 반영해 신분제를 철폐하는 등 근대적 제도 개혁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제국의 위세에 의존한 일부 세력을 중심으로 개혁이 추진된 근본적 한계 때문에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일본이 러시아 등의 삼국 간섭으로 그 위세를 잃으면서 추진력을 급격히 상실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살해하였으나 오히려 이는 신변의 불안을 느낀 고종의 아관파천을 초래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의 위세를 등에 업은 세력이 득세하였고, 김홍집 등 중심 인물들이 백성들에게 살해되거나 일본으로 도주·망명하여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개혁의 목표는 실현되지 못했다.

 

제1차 갑오개혁은 1894년(고종 31년) 7월 27일(음력 6월 25일)부터 1894년 12월 17일(음력 11월 21일)까지 김홍집을 중심으로 군국기무처 주도 하에 추진되었다.

 

제1차 김홍집 내각이 설치한 군국기무처는 김홍집, 김윤식, 김가진 등 17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임시 합의기관으로서, 행정제도, 사법, 교육, 사회 등 전근대적인 여러 문제에 걸친 사항과 정치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특히 '개국' 기원 연호를 사용하여 청과의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하여 기존 조선의 6조체계를 8아문(八衙門: 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으로 개편하였으며,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두었다. 개혁전담기구였던 군국기무처는 제2차 개혁 때 폐지되었다.

 

흥선대원군이 7월부터 8월까지 1개월 남짓 동안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과의 입장 차이로 은퇴를 강요받았다.

경제적 측면에서 은 본위 화폐 제도를 실시하고 도량형을 통일하였으며, 조세의 현금(現金) 납부제를 실시하였다.

 

제2차 갑오개혁

제2차 갑오개혁은 1894년 12월 17일(음력 11월 21일)[5]부터 1895년 7월 6일(음력 윤5월 14일)[2]까지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내각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의정부를 내각이라 고치고 7부를 두었다. 인사제도는 문무관을 개편하고 월봉(월급)제도를 수립하였으며, 과거 제도를 없애고 총리대신을 비롯한 각 아문 대신들에게 관리 임용권을 부여했다. 또한 행정제도를 23부로 개편하였으며, 신분제도의 개혁을 통해 문무, 반상(班常)의 구별을 폐지하였고, 지방관에 의해서 집행되던 사법과 군사업무를 중앙에 예속시켜서 근대 관료체제를 구축하였다.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은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을미사변 직후[6]부터 1896년 2월 11일(음력 을미년 12월 28일) 아관파천 직전까지 제3차 김홍집 내각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친일세력들이 내각을 구성하여 주도한 개혁으로 가장 친일적 성향이 짙었다.

 

이때 태양력을 도입하여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1896년 1월 1일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여 연호를 '건양'으로 변경했다. 단발령을 단행하였고, 정부 주도로 종두를 시행하였다. (사설 의원에서의 인두 및 우두 접종은 그 전에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근대적 우편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우체사가 설립되었다.

단발령의 강압적 시행은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던 일반 백성들의 반일, 반정부 감정을 폭발시켰고, 대규모 항일의병운동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이 운동을 을미의병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