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석(李範奭, 1900. 10. 20∼1972. 5. 11)장군은 1900년 10월 20일 서울 용동에서 4대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철기(鐵驥)이다. 이범석 장군은 유족한 환경과 개화적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부친은 1891년 증광시에 급제하여 농상공부 서기관으로 재직하던 관리였고, 또 가정교사이던 외삼촌 이태승은 신익희와 한성외국어학교 동창인 개화 지식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손위 매부인 신석우또한 개화 지식인으로 이름 높았으므로 이범석 장군은 어려서부터 이들의 근대적 사고와 신학문에 크게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후 이범석 장군은 부친이 강원도 이천 군수로 부임함에 따라 이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3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던 중 1915년 여름 한강에서 여운형을 만나게 되었다. 여운형은 당시 남경 금릉대학에 다니다 하기 방학이 되자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할 청년 학생들을 물색 중이었는데, 이 때 이범석 장군을 만난 것이었다.
이범석 장군은 여운형을 통해 국제 정세와 독립운동계의 소식을 듣고, 그의 권유로 중국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범석 장군은 그 해 11월 20일 신의주에서 일본 학생으로 가장하고 압록강 철교를 도보로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상해에서 신규식, 조성환, 신채호등 민족 지도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의 영향으로 장군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신규식의 주선으로 1916년 가을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에 입학하여 독립군 장교가 되기 위한 첫 발을 내디뎠다.
운남강무당은 일본 육사 출신인 당계요가 설립한 군관학교였다. 당계요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귀국하던 중, "한국 인민은 망국민(亡國民)이 아니다. 반드시 조만간 구제가 있을 것"이라며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였던 인물이었다.
신규식은 당계요에게 운남강무당에서 한국 청년들이 군사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교섭하였고, 그 결과 이범석 장군을 비롯한 5명의 한국 청년이 입학하게 된 것이다. 이범석 장군은 운남강무당 기병과를 수석 졸업함으로써 촉망 받는 기병장교가 되었다.
하지만 3·1운동 소식이 알려지자 독립운동에 동참하기 위하여 이범석 장군은 한국인 동기생 4명과 함께 장교직을 사직하고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임정 요원들과 논의 끝에 만주로 가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할 것을 다짐하게 된다. 상해를 떠나 만주로 향한 장군은 그 해 10월부터 통화현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의 고등군사반 교관으로 취임하여 독립군 장교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후 임시정부가 중경에 도착한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중국 국민정부의 후원 아래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이범석 장군은 여기에 참여하여 참모장이 되었다. 이후 이범석 장군은 실병력을 지휘하여 독립전쟁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참모장 자리를 내놓고 자원하여 제 2대장으로 부임하였다.
광복군 제2지대장으로서 이범석 장군은 최정예군을 만들기 위해 교육 훈련에 힘쓰는 한편,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이범석 장군은 미국 전략정보국의 지원 아래 한국 광복군을 훈련시킨 뒤, 잠수함이나 항공기로 국내에 투입하여 공작 거점을 확보하고 정보를 수집케 하는 독수리 계획(Eagle Project)을 추진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이범석 장군에 의해 선발된 38명의 한국광복군 요원들이 OSS의 교육 훈련을 수료하고 국내 침투를 기다렸지만, 일제의 항복으로 말미암아 실현되지 못하였다.
일제의 항복 직후 이범석 장군은 곧 바로 OSS와 연계한 국내 정진대 파견을 추진하였다. 이는 가급적 신속히 국내로 광복군을 진입시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나아가 임시정부 환국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된다.
이 같은 이범석 장군의 의도는 임정 지도부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범석 장군은 국내 정진대를 편성한 뒤 OSS의 지원 아래 8월 16일 국내 진입을 시도하였지만 산동반도를 지나던 중 일본군의 미군 공격 소식이 알려짐에 따라 되돌아 왔다.
그 뒤 이범석 장군은 OSS 요원들과 함께 다시 국내 진입을 시도하여 8월 18일 12시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하여 그리던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동경으로부터 명령을 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국내 진입과 한국인 접촉을 허용하지 않아 다음날 중국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범석 장군은 임정 요인들이 모두 귀환한 뒤인 1946년 6월 3일 500여 명의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인천항을 통해 조국에 돌아왔다. 귀국 직후 이범석 장군은 좌우의 극한 대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범석 장군은 1946년 10월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내세운 민족청년단을 결성하여 해방 공간에서 민족 국가 건설에 힘썼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는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으로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군 창설과 육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범석 장군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