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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nyd만물유심조 2017. 4. 3. 12:55

 

 

제주 4·3 사건(濟州四三事件)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 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되어 있다.

 

발생배경

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상륙을 막기 위해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했던 전략기지로 변하였고, 종전 직후에는 일본군 철수와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의 귀환으로 급격한 인구변동이 있었다. 광복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수백 명의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의 악재가 겹쳤고,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군정관리의 모리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발생하면서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 사건은 4·3사건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남로당 제주도당은 경찰발포에 항의하는 ‘3·10 총파업’을 주동하였다. 이 파업에는 관공서 민간기업 등 제주도 전체의 직장 95% 이상이 참여하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 이 총파업이 경찰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하였다. 그러나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하였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교체되었고, 응원경찰과 서북 청년단(이하 서청) 단원 등이 대거 제주도에 내려가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하였다. 검거시작 한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3사건’의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었다. 1948년 3월에는 일선 경찰서에서 연이어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조직 노출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던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신진세력을 규합하였고, 군정당국에 등 돌린 민심을 이용해 두 가지 목적, 즉 하나는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써, 다른 하나는 당면한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구국투쟁’으로써 무장투쟁을 결정하였다.

 

내용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경찰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이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요구하였다. 미군정은 초기에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수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태가 오히려 악화되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경비대에 진압작전을 명령하였다. 한편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 측 김달삼과의 「4·28 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해결에 합의하였으나 우익청년단체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등으로 무효화되었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과 24군단 작전참모 슈 중령의 제주 파견, 경비대 9연대장 교체 등을 통해 5·10 선거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려고 노력하였으나,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가 되었다. 그러자 미군정은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최고사령관으로 임명,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며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5월 20일에는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해 무장대 측에 가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6월 18일 신임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 의해 암살 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충격을 주었다. 그 이후 제주 사태는 소강국면에 들어갔고, 무장대는 김달삼 등 지도부의 ‘해주대회’ 참가 등을 통해 조직을 정비하였다.

 

남한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에는 김일성 정권이 수립되어짐에 따라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하였다. 그러나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든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미군정은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중산간지대 뿐만 아니라 해안변 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학살되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심지어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하였다.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도 강경진압을 계속하였다.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하였다. 가장 인명피해가 많았던 '북촌사건'도 2연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선무 병용작전이 전개되었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하였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실시되었고, 그해 6월 무장대 총책 이덕구의 사살로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 학살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되었다. 잔여 무장대들의 공세도 있었으나 그 세력은 미미하였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이로써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