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는 낙동강 하류 유역의 변한 땅에서 여러 부족이 일어나서 연합한 나라이다. 가야는 여섯 개의 가야가 있는데 ; 대가야, 소가야, 금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이다. 이렇게 여섯개의 부족이 연맹 왕국을 이루고 있었는데 초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가야 연맹을 주도 하였지만 광개토대왕이 대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공격해와서 크게 타격을 입은 금관가야는 맹주로서의 지위가 흔들리게 되었다.
가야는 낙동강 하류 지역의 해상 활동에 유리한 입지 조건과 철의 생산 및 교역 활동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는데 특히 김해 지방에는 질 좋은 철이 많이 나서 각종 철제 무기를 만들어 사용하였기 때문에 철의 나라라고도 한다. 가야는 낙동강 동쪽으로는 신라때문에 진출을 하지 못하여 백제와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신라를 견제했다.
대가야에도 질 좋은 철이 많이 생산되었고 농업 입지 조건도 좋고 전쟁의 피해(광개토대왕의 공격)도 입지 않았기에 나중에는 대가야가 가야 연맹을 주도 하게 된다.
-가야의 멸망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 연맹은 5세기 후반에 크게 성장하여 세력 범위를 넓혔지만 6세기에 이르러서는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서 두 나라의 압력을 계속 받아 위축되었다. 백제가 한강 유역을 잃었기에 그 보상을 가야에서 찾으려 하였고 신라도 이에 자극을 받아 계속 공격을 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와 백제는 이미 중앙집권국가를 이뤄냈지만 가야는 아직 연맹왕국 단계(각 소국이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유지함)여서 지배력을 집중시키지 못하였다.
가야의 멸망요인에는 외부적요인 : 백제와 신라의 중간의 위치하여 두 나라의 세력다툼을 위한 전장이 되었다.
내부적요인 : 여섯 개의 각 소국이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유지해서 지배력을 집중시키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어서 불안한 정치 상황이 계속 되자 결국엔 멸망하고 만다.
신라의 법흥왕 때에는 금관가야가, 진흥왕 때에는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국력이 서로 비슷했던 여섯 개의 가야 연맹은 결국 통일 왕국을 이루지 못한 채 멸망하였다. 그러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발전하였던 가야 문화는 뒤에 신라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가야금, 토기, 금관 등등) 또 일부 세력은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고대 문화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지배면적으로 볼 때도 가야는 경상남·북도의 낙동강 유역과 그 서쪽 일대를 점유했다.최전성기엔 전라남·북도동부지역까지 지배했다. 이는 전성기의 고구려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백제나 신라에 비하면 손색이 없다. 요컨대 가야는 신라.백제에 버금가는 존재였다는 뜻이다.
가야가 소국 연맹체제에 머무른 채 고대국가를 완성하지 못해 하나의 국가로 취급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가야연맹은 고구려·백제·신라와 관계를 맺을 때 하나의 정치체제로서 역할을 하였다.
또 출토 유물 등으로 미루어 개별 소국들의 생산력이나 기술수준도 매우 높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기원전 1세기부터 700년 가까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독자적인 역사를 유지했다.
세계 최초로 고대 철제 말(馬)갑옷의 실물이 발견된 곳은 다름아닌 한반도 남단의 가야다. 경남 함안의 마갑총에서 발견된 말의 갑옷과 투구는 가야시대 맹주국의 하나였던 5세기 초 안라국의 발전된 사회기반과 강력한 무력을 상징한다. 가야는 이미 1세기에 철기를 기반으로 성장했고 당시의 하이테크였던 철 제련 능력과 토기 생산기술은 일본보다 500년이나 앞섰다.
-금관가야왕 계보
1. 수로왕(首露) (7239 , AD42) 재위기간(157년)
1년(서기 42년) 성은 김(金)으로 9간에 의해 6형제와 함께 6가야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2년(서기 43년) 봄 정월에 임시대궐 남쪽 신답평으로 가 주위 1,500보 되는 외성에 궁궐전각과 일반관사와 무기고, 곡식창고들의 자리를 잡고, 그달 20일 부터 견고한 성터를 짓는데 그 기간을 농한기를 타서 성을 짓게 하였고 좋은 날을 받에 새로운 대궐로 들어갔으며 일체사무에 근면하였다.
7년(서기 48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許黃玉)이 오빠인 장유화상과 같이 불탑인 파사석탑(婆娑石塔)과 불경 등을 가지고 들어오니 친히 그녀를 마중나가 성으로 데려오고, 결혼을 하였다.
37년(서기 78년)년 신라의 길문(吉門)이 쳐들어 와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54년(서기 96년) 9월 신라의 남쪽을 습격하여 가성주(加城主) 장세(長世)를 죽였으나, 신라임금이 친히 5천군사로 쳐들어 오니 물러났다.
60년(서기 102년)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국토 논쟁을 벌이니 임금이 바르게 판결하였다.
74년(서기 116년)년 신라가 침범하니 황산하(黃山河)에서 이를 물리쳤다.
147년(서기 189년)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임금은 매양 구슬픈 공방살이 노래를 부르면서 언제나 비탄에 잠겼었다.
157년(서기 199년) 왕후가 죽은 지 10년만에 임금이 죽으니 그 나이가 158세였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높이 한길, 주위가 3백보 되는 빈궁을 만들고 여기에 장사하니 수릉왕묘라 불렀다.
2. 거등왕(居登) (7396 , AD199) 재위기간(54년)
어머니는 허황후(許皇后). 기묘(己卯; 199) 3월 13일에 즉위(卽位), 치세(治世)는 39년으로 계유(癸酉; 253) 9월 17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이며 태자(太子) 마품(麻品)을 낳음.
12년(서기 210년) 포상팔국(浦上八國)이 침략을 도모하여 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니 신라 내해이사금은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伊伐찬) 이음(利音)에게 이를 치게 하니 팔국이 모두 항복하였다.
61년(서기 259년) 임금이 태자 마품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3. 마품왕(麻品) (7450 , AD253) 재위기간(38년)
신해(辛亥; 291) 1월 29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孫女) 호구(好仇)로 태자(太子) 거질미(居叱彌)를 낳음.
39년 1월 29일에 임금이 승하하니 태자 거질미가 왕위에 올랐다.
4. 거질미왕(居叱彌) (7488 , AD291) 재위기간(55년)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金氏). 영평(永平) 원년에 즉위.병오(丙午; 346) 7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아궁아간(阿躬阿干)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王子) 이시품(伊尸品)을 낳음.
56년 7월 8일에 임금이 승하하니 태자 이시품이 왕위에 올랐다.
5. 이시품왕(伊尸品) (7543 , AD346) 재위기간(61년)
혹은 이품(伊品). 정미(丁未; 407) 4월 10일에 죽음.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으로, 왕자 좌지(坐知)를 낳음.
24년(서기 369년)에 백제가 병력을 나누어 침공하니 이기지 못하고 패하였다.
58년(서기 401년) 고구려가 침범하여 들어오니 이를 막지 못하니 임나가라 (任那加羅), 아라가야가 항복하였다.
62년 4월 10일 왕이 승하하니 태자 좌지가 왕위에 올랐다.
6. 좌지왕(坐知) (7604 , AD407) 재위기간(14년)
용녀(傭女)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니 국내가 시끄러웠다.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로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신유(辛酉; 421) 4월 12일에 죽음. 왕비는 도령대아간(道寧大阿干)의 딸 복수(福壽)로, 아들 취희(吹希)를 낳음.
15년 5월 12일 임금이 승하하니 태자 취희가 왕위에 올랐다.
7. 취히왕(吹希) (7618 , AD421) 재위기간(30년)
질가(叱嘉)라고도 함. 김씨(金氏). 신묘(辛卯; 451) 2월 3일에 죽음. 왕비는 진사각간(進思角干)의 딸 인덕(仁德). 왕자(王子) 질지(질知)를 낳음.
31년 2월 3일에 임금이 승하하였다
8. 질지왕 (7648 , AD451) 재위기간(41년)
김질왕(金질王)이라고도 함.이듬해에 시조(始祖)와 허황옥 왕후(許黃玉王后)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만났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쓰게 함.임신(壬申; 492) 10월 4일에 죽음. 왕비는 김상사간(金相沙干)의 딸 방원(邦媛). 왕자 겸지(鉗知)를 낳음.
2년(서기 452년) 시조왕과 허황옥왕후를 위하여 수로왕과 왕후가 결혼하였던 곳에 절을 세워 황후사라 부르고 전토 10결을 바쳐 여기 충당하게 하였다.
29년(서기 479년) 바다건너 남제와 통교하였다.
31년(서기 481년) 고구려가 신라를 침범하여 신라가 도움을 청하니 군사를 내어 이를 물리쳤다.
42년(서기 492년) 10월 4일에 임금이 승하하니 태자 감지가 왕위에 올랐다.
9. 겸지왕(鉗知) (7689 , AD492) 재위기간(29년)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함. 정광(正光) 2년 신축(辛丑; 521) 4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출충각간(出忠角干)의 딸 숙(淑). 왕자 구형(仇衡)을 낳음.
30년 4월 7일에 임금이 승하하니 구형이 태자 구형이 왕위에 올랐다.
10. 구형왕(仇衡) (7718 , AD521) 재위기간(41년)
임오(壬午; 562) 9월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침략으로 멸망.
1년(서기 521년) 감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왕비는 분즐 수이즐의 딸 계화이다.
2년(서기 522년)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신라에 결혼동맹을 요청하니, 신라임금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딸을 임금에게 시집보냈다.
9년(서기 529년) 신라가 동맹을 파기하면서 북경과 금관가야를 공격하였다.
12년(서기 532년) 신라가 본국의 금관가야에 침범하니 금관국왕(金官國王) 김구해(金仇亥)가 항복하였다.
※이후 가야연맹체의 주도권이 대가야로 넘어가게 되었다.
-대가야왕 계보
1.이진아시왕 9. 이뇌왕 16. 도설지왕
1. 개국시조인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삼국사기 지리지 고령군조에 대가야국의 시조를 이진아왕(伊珍阿王) 혹은 내진주지(內珍朱智)이라 하였고, 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는 최치원의 저술을 빌려 이르기를 대가야왕을 뇌질주일(惱窒朱日)이라 표현하였다... 그는 天神(남신)인 이비가지와 地神(여신)인 정견모주가 감응하여 금관가야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수로왕(首露王)와 함께 낳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름이 좀 낯설다. 원래는 가야 고유의 우리말 이름이었던 것을 한자로 음과 훈을 섞어 옮기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현대의 일본사람 이름과도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실재 사람이름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왕을 높여부른 존칭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신라의 관리의 관등 중에 파진찬 등의 명칭이 보이는데 '찬'은 '智' 혹은 '가한[Khan]의 말과 통하는 우두머리, 수장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대가야 제9대왕 이뇌왕(伊惱王)과 제10대왕 월광태자
삼국사기 지리지에 일명 이부리지가(已富利知加)라고도 한다, 부인은 신라 법흥왕9년(522년)이찬 벼슬을 지낸 비지배(혹은 비조부)의 딸(혹은 누이)이다. 그 아들이 제10대왕인 월광태자(月光太子)다. 월광태자는 제16대왕인 도설지왕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마지막 왕으로 보기도 한다.
3. 대가야 마지막 제10대왕 혹은 제16대왕 도설지왕(道設智王)
신라 화랑 사다함과 장군 이사부(김이사부)가 이끄는 신라군에 항복함으로써 대가야는 신라 진흥황23년(562년)에 멸망하게 된다.
김수로왕이 나라를 처음 열은 이후로 그 년수가 520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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