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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라 간디 총리 암살

nyd만물유심조 2023. 10. 31. 11:06


인디라 프리야다르시니 간디(Indira Priyadarśinī Gāndhī 1917.11.19 ~ 1984.10.31)는 인도의 정치인 가문 출신으로 첫 여성 총리이다. 1966년 1월 19일부터 1977년 3월 24일까지, 그리고 1980년 1월 14일부터 1984년 10월 31일에 살해당할 때까지 두 차례에 걸쳐 총리를 역임했으며 인도에서 현재까지도 여성으로서는 유일하다.

인디라 간디는 1917년 11월 19일 알라하바드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자와할랄 네루의 유일한 자녀였지만 유년 시절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는 인도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항상 어딘가로 돌아다니기 바빴고 어머니 카말라 네루는 몸이 병약해 어린 인디라를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외롭게 혼자 자랄 수 밖에 없었던 인디라는 주로 가정교사들에게 배웠고, 아버지와는 제대로 만나지도 못한 채 편지로만 접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녀는 초·중등학교는 간헐적으로만 출석했고 대부분의 학문을 가정교육으로 받았다. 그러던 중 스위스 로잔에서 요양하던 어머니 카말라 네루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자 이를 계기로 유럽으로 건너갔고, 1937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서머빌 칼리지에 진학해 정치학, 역사학, 경제학 등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인디라 네루는 어머니를 닮았던지 유럽에서 체류하는 동안 건강이 썩 좋지 않았다. 때문에 종종 스위스로 건너가 치료를 받았는데, 1940년에 나치 독일이 유럽 전역을 집어삼키자 유색인종으로서 당연히 위협을 느낀 인디라는 필사적으로 유럽을 탈출해 영국으로 피난했다. 그리고 영국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인디라는 1941년에 대학 과정을 채 수료하지도 못하고 인도로 돌아오게 된다. 인디라가 영국에서 공부하는 도중에 만난 운명의 상대가 마찬가지로 영국에서 유학하던 페로제 간디였다. 인디라 네루는 페로제 간디와 결혼했고, 이때부터 '인디라 간디'라고 불리게 된다. 1944년에는 페로제 간디와 인디라 간디 사이에서 아들 라지브 간디를 낳았고 1946년에는 산제이 간디를 출산한다.

- 정계진출
마침내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가 인도 공화국의 초대 총리로 선출되자 인디라 간디는 이를 계기삼아 활발하게 정계에 진출한다. 그녀는 사실상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의 개인 비서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 인맥을 넓혀나갔고, 1950년대 말에는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인도 국민회의의 당대표 직위에까지 올랐다.

이렇게 인도가 영국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해 근대적 국민국가로 탈바꿈하는 데 기여한 초대 총리 네루는 1964년 집권 17년 만에 병사했다. 많은 사람들이 네루 생전에 차기 지도자가 누구일지 궁금해했다. 당시 네루는 자신의 딸 인디라 간디가 대권을 잡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오해’를 살 만한 일도 몇 가지 있다. 먼저 네루는 독립 이전에 사망한 부인 대신 인디라 간디가 오랫동안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하도록 허용했다. 또한 네루가 사망하기 몇 달 전, 인디라는 아버지의 후광을 적극 활용해 집권당인 인도국민회의(간디와 네루의 지도하에 반영(反英) 운동을 펼친 보수 정당)의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네루는 이를 만류하지 않았다.

네루 사후 치러진 선거에서 인도국민회의는 다시 여당이 되었다. 총리 자리는 샤스트리(Lal Bahadur Shastri)라는 원로 정치인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샤스트리 역시 임기 중 2년을 겨우 마친 상태에서 병사한다. 그다음이 인디라 간디다. 또한 그녀의 아들 라지브 간디가 총리직을 역임했고, 라지브의 아들 라훌 간디도 차기 총리 1순위로 거론된다는 점에서 ‘권력 세습’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네루 왕조’라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네루가 딸 인디라를 후계자로 지명하거나 이를 위해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네루 왕조’보다는 ‘인디라 간디 왕조’가 더욱 적합할 것이다.

1966년 총리에 취임한 인디라 간디는 한동안 아버지 네루의 국가 건설 원칙을 확고히 지켰다. 그 원칙이란 의회민주주의, 사회주의적 사회, 세속주의(정교 분리) 등이다. 그러나 인디라와 집권당인 인도국민회의는 경제 부문에서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식량 위기에 외환 위기, 그리고 큰 폭의 물가인상까지 겹쳤다. 1967년에는 서벵골의 낙살바리에서 마오주의 농민 반군이 무장 봉기를 일으킨다. 서벵골과 케랄라에서는 공산당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인디라 간디 정부는 ‘먹는 문제’부터 해결하자며 녹색혁명을 추진해 생산 측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분배 구조가 개혁되지 않은 상태에서 식량 생산만 증가되니, 그 혜택은 고스란히 지주들에게 독점될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의 불만이 치솟았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인디라 간디는 반민주 독재정치로 기운다. 1971년 총선 때 인디라는 ‘가난 추방’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렇지만 빈곤의 근본 원인인 지주제, 부패, 부유층 탈세 등에 대한 구체적 방안은 내세우지도 실천하지도 않았다. 이후 인디라의 정치 기조는 ‘가난(garib)’이 아니라 ‘가난한 자(garibi)’를 추방하는 것으로 전환된다.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으로는, 적대 국가에 대한 적개심으로 충만한 포퓰리즘이 채택되었다. 예컨대 인도는 1971년 ‘방글라데시 해방전쟁(당시 ‘동파키스탄’이던 방글라데시가 서파키스탄 정부에 대항해서 벌인 독립전쟁)’에 참전해 승리를 거두었다. 1974년에는 암호명 ‘미소 짓는 붓다’로 핵실험에 성공했다.

인디라 간디 정부는 경제에는 무능했다. 대신 파키스탄이라는 ‘적대 국가’를 빌미로 전쟁과 핵 개발을 통해 강한 국가를 천명하는 것으로 복잡한 정치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그러나 1973년 델리를 비롯한 북부 인도 전역에서 시민들의 분노가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경제난의 심화와 끊이지 않는 부정부패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에 더해 인디라 간디는 1975년 6월, 알라하바드(Allahabad) 고등법원에서 의원직과 향후 6년간 피선거권을 박탈당하는 판결을 받는다. 그녀가 자신의 선거구에서 저지른 부정선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디라는 판결에 승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도 헌정사상 처음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강압통치로 들어간다. 그녀는 야당 정치인 구속, 언론 탄압 등을 서슴지 않았다. 차남인 산자이 간디를 2인자로 앞세워 도시 빈민가를 강제 철거했다. 산아 제한이라는 명분으로 빈민 남성들을 강제로 잡아들여 불임수술을 강요했다.

국민 저항이 들불같이 번졌고, 이어진 1977년 총선에서는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다. 민주주의 회복을 기치로 내걸고 반(反)인디라 간디 연합전선을 구축한 국민당(Janata Party)이 처음으로 단독 과반을 차지해 일약 집권 여당의 위치에 오른 것이다. 인도공산당도 서벵골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공산당 집권 정부를 구성했다. 그런데 국민당은 이질적인 정파 연합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2년도 채우지 못한 채 권력을 다시 인디라 간디가 이끄는 인도국민회의에 내주게 된다.

상대방의 무능 덕분에 다시 집권하게 된 인디라 간디는 권력 유지를 위해 더욱 비정상적인 정치에 빠져들었다. 펀자브 주의 분리주의자들을 자극하는 등 종교분쟁에 개입한 것이다. 펀자브 주는 시크교도가 다수이지만 인도(힌두교가 강한)에 포함되어 있다. 펀자브 주의 지역 여당인 아칼리 달(Akali Dal)은 원래 종교적 색채가 매우 강한 정당이었으나 1980년대에는 세속주의 정파가 주도권을 잡은 상태였다. 인디라는 아칼리 달을 분열시키기 위해 당내 야권인 종교 근본주의 세력을 암암리에 지원했다. 그 결과, 근본주의 세력이 득세한 아칼리 달은 펀자브에 독립 주권국가인 칼리스탄(Khalistan)을 세워야 한다는 분리주의 집단으로 성장해 요인 암살 등 테러를 일삼았다. 인디라로서는 일종의 인과응보였지만, 묵과할 수 없는 사태였다. 결국 1984년 6월3일 인도 정부는 탱크 등 중화기로 무장한 군대를 시크교 성지인 암리차르(Amritsar)의 황금사원에 투입해 300명가량의 무장 반군을 소탕했다. 성지가 피로 얼룩졌다.

- 암살
블루스타 작전을 통해 시크교도들을 강경진압한 인디라 간디 총리는 1984년 10월 31일 뉴델리에서 시크교도 경호원에게 암살당한다. 그녀는 그날 아일랜드 방송국에서 만드는 다큐멘터리에 쓸 인터뷰를 촬영하기 위해 길을 나서고 있었다. 그녀가 길을 가던 도중 문 양쪽으로 서 있던 시크교도 출신 경호원 사트완트 싱과 베안트 싱이 그녀에게 총을 난사했다. 특히 사트완트 싱의 경우 인디라 간디에게 기관단총으로 30발이 넘는 총탄을 난사하며 그녀를 잔혹하게 공격했다. 멀리 있던 경호원들이 달려들자 사트완트 싱과 베안트 싱은 즉각 항복했고, 원인은 몇 달전 있었던 블루스타 작전에서 시크교도들을 탄압한 인디라 간디에 원한을 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베안트 싱의 경우 옆방으로 끌려가 즉결처분당해 죽었고 사트완트 싱은 델리 교도소에서 교수형당했다.

한편 인디라 간디는 그때까지만 해도 숨은 붙어있었기에 즉각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총탄을 30발 가까이 직격으로 맞았던만큼 워낙 부상이 심각해 오후 2시 20분에 향년 66세로 사망선고를 받았다. 그녀의 사망소식은 총격이 발발한지 10시간이나 지난 후 저녁 뉴스에서 발표된다. 인디라 간디의 암살 소식이 알려지자 국민들은 경악했고, 대권은 그대로 그녀의 아들이자 비공식적 후계자나 다름없던 라지브 간디에게로 넘어갔다.

인디라 간디는 본인이 그렇게 극렬하게 시크교도들을 탄압하고도 경호원인 사트완드 싱과 베안트 싱은 그대로 두었는데 그것이 목숨을 재촉했다. 한편, 시크교에서는 이 날을 순교자의 날로 기리며 이 2명을 성자로 찬양했다. 이 2명의 유족들은 시크교를 탄압하고 많은 시크교인을 죽게 한 인디라 간디를 응징한 영웅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이 암살의 여파는 굉장히 커서 11월 3일에 열린 간디의 장례식에는 50만 명이 참여했고, 인디라 간디의 죽음에 분노한 힌두교도들이 폭동을 일으켜 수도 뉴델리에서만 시크교도들이 3천 명, 전국적으로는 무려 8천 명의 시크교도들이 보복학살을 당했다. 더 최악인 것은 인도 정부가 폭동을 진압만 하고 학살자들을 처벌하는데 지지부진했다는 것이다.

결국 더욱 분노한 시크교도들도 인도항공 182편 폭파 사건을 비롯한 테러로 맞대응하고, 이로 인하여 국제적으로 인도 정부가 비판을 받자 부랴부랴 학살에 대하여 책임 소재를 따지고 뒷북을 치는 등 총체적 난국을 연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