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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甲午改革)은 1894년 7월 27일(음력 6월 25일)부터 1895년 7월 6일(음력 윤5월 14일)까지 갑신정변의 실패 후 망명했던 개화파들이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위세를 업고 돌아와 추진한 일본식 개혁으로서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불렸으며 총 2차례에 걸쳐 개혁이 이뤄졌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추진된 제3차 개혁은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으로 따로 분류한다.
更張은 "다시 당긴다"는 뜻으로 "거문고 소리가 조화롭지 못하면 반드시 그 줄을 풀어서 다시 조여야 한다"는 한서의 동중서전에서 유래한 말이다. 국어 사전에서는 경장을 "정치적ㆍ사회적으로 묵은 제도를 개혁하여 새롭게 함"이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경장은 주로 봉건 체제의 틀 내에서의 보강을 의미하는 전통적 용어로 간주되는 편이다. 완전히 갈아엎는 '개혁'에 비해 전반적인 틀은 바꾸지 않는다고 보면 되겠다.
갑오개혁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신분제(노비제)의 폐지, 은본위제, 조세의 금납 통일, 인신 매매 금지,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 폐지 등이다.
• 당시 배경
갑오개혁의 원인을 제공한 사건은 1894년(고종 31) 1월 10일 고부민란(古阜民亂)으로부터 비롯된 동학농민운동이었다.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은 진정되지 않고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정부는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청군이 조선에 진주하자 일본도 텐진조약을 근거로 군대를 파견하여 양국 군대가 조선에서 팽팽하게 대치하기 시작하였다.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이 동아시아 차원의 사건으로 비화한 것이다.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조건으로 농민군과 화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양국에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청하였다. 청국은 이 요청에 응하였지만 일본은 거부하였다. 일본은 조선 내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변란이 계속 일어나고 있으므로 내정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전까지는 철수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은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을 추진하자고 청국에 제의하였다. 일본은 청국이 이 제안을 거부하자 단독으로 조선정부에게 내정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1894년(고종 31) 6월 남산에 있는 민영준의 별장인 노인정(老人亭)에서 조선주재 일본공사와 조선 관리들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회담이 열렸다(노인정회담).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는 이 회담에서 조문화된 내정개혁방안을 제시하였지만 조선정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대신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개혁을 실시하겠다고 통보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6월 21일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당시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여 외견상 흥선대원군이 일으킨 조선 내의 정변에 군사력을 지원하는 것처럼 꾸몄다. 하지만 실제로 이 사건의 주역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해 고종을 압박한 상태에서 친일적인 정부를 수립하여 내정개혁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갑오개혁은 일본의 청일전쟁 도발을 위한 명분 쌓기의 용도로 시작되었다.
• 제1차 갑오개혁
1894년 7월 27일(음력 6월 25일)부터 12월 17일(음력 11월 21일)까지 김홍집 내각을 중심으로 군국기무처 주도 하에 추진되었다. 김홍집 내각이 교정청을 폐지하고 설치한 군국기무처는 김홍집, 김윤식, 김가진 등 17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임시 합의기관으로서, 행정제도, 사법, 교육, 사회 등 전근대적인 여러 문제에 걸친 사항과 정치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군국기무처의 회의총재는 영의정 김홍집이 맡았다. 특히 '개국' 기원 연호를 사용하여 청과의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하여 기존 조선의 6조체계를 8아문(八衙門: 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으로 개편하였으며,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두었다.
궁내부는 전과 달리 왕실 사무와 정부 사무를 분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탁지아문은 재정을 일원화하였고 과거제 폐지, 은 본위 화폐 제도를 실시하고 도량형을 통일하였으며, 조세의 현금(現金) 납부제를 실시하였다. 또 경무청이 설치되어 경찰 제도가 실시되었다.
흥선대원군이 7월부터 8월까지 1개월 남짓 동안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과의 입장 차이로 은퇴를 강요받았다.
• 제2차 갑오개혁
제2차 갑오개혁은 1894년 12월 17일(음력 11월 21일)부터 1895년 7월 6일(음력 윤5월 14일)까지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내각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1차 개혁 전담기구였던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내각이라 고쳐 내각 제도가 되었고 그 아래 8아문이 개편된 7부를 두었다. 인사제도는 문무관을 개편하고 월봉(월급)제도를 수립하였으며, 총리대신을 비롯한 각 아문 대신들에게 관리 임용권을 부여했다. 또한 행정제도를 지방 8도에서 23부로 개편하였으며, 신분제도의 개혁을 통해 문무, 반상(班常)의 구별을 폐지하였고, 지방 행정관에 의해서 집행되던 사법권을 폐지하고 독립된 재판소를 설치하였으며 군사적 권한을 더욱 중앙에 예속시켜서 근대 관료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때 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홍범 십사조(洪範十四條)가 1894년 음력 12월 12일(1895년 1월7일) 제정·선포되었다. 주요 내용은
제1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제2 왕실 전범(王室典範)을 작성하여 대통(大統)의 계승과 종실(宗室)·척신(戚臣)의 구별을 밝힌다.
제3 국왕(大君主)이 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되, 왕후·비빈·종실 및 척신이 관여함을 용납치 아니한다.
제4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분리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제5 의정부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 권한의 한계를 명백히 규정한다.
제6 부세(賦稅, 세금의 부과)는 모두 법령으로 정하고 명목을 더하여 거두지 못한다.
제7 조세 부과와 징수 및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장한다.
제8 왕실은 솔선하여 경비를 절약해서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제9 왕실과 각 관부(官府)에서 사용하는 경비는 1년간의 예산을 세워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제10 지방관 제도를 속히 개정하여 지방관의 직권을 한정한다.
제11 널리 자질이 있는 젊은이를 외국에 파견하여 학술과 기예(技藝)를 익히도록 한다.
제12 장교(將校)를 교육하고 징병제도를 정하여 군제(軍制)의 기초를 확립한다.
제13 민법 및 형법을 엄정히 정하여 함부로 가두거나 벌하지 말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제14 사람을 쓰는 데 문벌(門閥)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
•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은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을미사변 직후부터 1896년 2월 11일(1895년 음력 12월 28일) 아관파천 직전까지 제3차 김홍집 내각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친일세력들이 내각을 구성하여 주도한 개혁으로 가장 친일적 성향이 짙었다.
이때 태양력을 도입하여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1896년 1월 1일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여 연호를 건양으로 변경했다. 단발령을 단행하였고, 정부 주도로 종두를 시행하였다(사설 의원에서의 인두 및 우두 접종은 그 전에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근대적 우편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우체사가 설립되었다. 단발령의 강압적 시행은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던 일반 백성들의 반일, 반정부 감정을 폭발시켰고, 대규모 항일의병운동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이 운동을 을미의병이라고도 한다.
• 의의와 결언
갑오개혁은 멀리 실학(實學)에서부터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에 이르는 조선시대의 여러 가지 개혁요구 내지 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반청·독립정신을 가진 친일개화파 관료들이 추진한 개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조선사회에 있어서 근대적인 개혁에의 내재적 지향을 반영한 획기적인 개혁으로서,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나 청말(淸末)의 무술변법(戊戌變法)에 대비되는 우리나라 근대화의 중요한 역사적 기점이었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그 시의성(時宜性)과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추진세력이 일본의 무력에 의존하였다는 제약성 때문에, 반일·반침략을 우선시켰던 국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었다고 할 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