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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변

nyd만물유심조 2023. 5. 11. 20:35


5.16 군사정변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 소장과 김종필 등 정군파(整軍派)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군사쿠데타이다.

1960년 시민들이 4·19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지 1년 남짓 뒤에 발발한 5.16 군사 쿠데타는 한국사회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과정을 결정적으로 지연시켰다. 4·19혁명 이후 허정 과도정부나 이를 계승한 장면 정권은 4·19혁명의 과제를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했고 정당 등 정치권도 제대로 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환경속에 군부 내에서 청년 장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정군 운동이 쿠데타로 이어졌다. 성공한 쿠데타군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했고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군정에 돌입했다. 30년 이상 지속된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 당시 사회적 배경
이승만 정권에 의한 군의 정치화 과정은 군부 엘리트 장교들 사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박정희와 같은 정치지향적 군인을 양산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전쟁을 통해 초창기 군 간부들은 고속 승진할 수 있었으나, 육사 8기생 등 후배 그룹들은 인사적체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1950년대 군부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청년장교들의 불만을 더욱 강화시키게 되어 이른바 정군운동이 발생하는 등 쿠데타의 한 배경을 이루었다.

국내 정치사회적 배경으로는 첫째, 4 · 19혁명 이후의 정치 · 사회적 정세의 유동성이다. 4 · 19혁명으로 수립된 허정 과도정부나 이를 계승한 장면 정권은 4 · 19혁명의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면 정권의 부정축재자, 선거부정 관련자 처리도 지지부진했고, 특히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억압되었던 다양한 사회적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었지만 이를 제대로 수렴하지 못했다. 오히려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이라는 2대 악법 제정 시도와 같이 대중적 진출을 억압하기 위해 노력했기에 커다란 반발만 불러왔다.

두 번째는 장면 민주당 정권의 내분이었다. 신파와 구파로 분열된 민주당은 극심한 내부 분열로 제대로 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장면 주도의 신파와 윤보선 · 김도연 등의 구파는 총리와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격돌한 이래 사사건건 대립했다. 결국 장면 총리, 윤보선 대통령이 결정되기는 했지만 분열은 더욱 극단화되어 구파는 1960년 9월 22일 민주당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여 극한 투쟁을 벌였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장면 정권은 두 달이 멀다 하고 개각에 개각을 거듭해야 하는 정치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세 번째는 혁신계, 학생 · 청년, 노동 분야 등을 중심으로 진행된 사회운동의 양질적 발전이었다. 혁신계는 주로 명망가 중심의 정당운동을 전개했지만, 학생과 청년 부분은 실질적인 대중동원력을 갖춘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혁신계와 청년 · 학생운동은 통일운동을 중심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는데, 보수 진영의 반공 이데올로기 공세라는 역풍을 불러오기도 했다. 교원노조 운동 등으로 나타난 노동운동 또한 기존의 억압적 노동통제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기존 지배질서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여겨졌다.

국외적 배경으로는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가 중요했다.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직접 원조를 삭감하면서 피원조 국가의 자체 생산력 강화를 도모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로스토우(Rostow) 등의 근대화 노선으로 연결되었다. 미국의 근대화론에서는 경제성장 문제가 매우 중요한 과제였으며, 이를 추진할 근대적이고 강력한 리더십 문제를 강조했는데 군부가 새로운 리더십의 주요 구성부분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미국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쿠데타 발발과 진압에 결정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모의
위와같은 당시 사회적 배경속에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1961년 3월 경부터 폭동진압계획에 동원될 군부대 장교들을 포섭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조직된 장교 40여 명이 쿠데타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박정희와 함께 1961년 4월 6일 명동의 양명빌딩에 모여 쿠데타 참여를 맹세했다. 이렇게 쿠데타 준비를 마친 이들은 1961년 4월 19일 4월혁명 1주기 때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 폭동진압 명령이 내려지면 자연스럽게 시내로 진입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의 실행을 위해 학생들의 시위를 과격한 방향으로 조장하기 위해 비밀공작까지 진행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가 예상과 달리 조용하게 지나가자 5월 12일을 다시 거사일로 정했다. 이 계획 역시 사전 정보 누설로 무산에 그치고 마침내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동안 이러한 혁명기도의 정보가 여러 차례에 걸쳐 정보기관에 알려졌고, 그 때문에 장면 총리와 현석호(玄錫虎) 국방장관이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불러 물었으나, 장 총장은 “박정희 소장은 그런 위인이 못 된다.”는 답변으로 수뇌부를 안심시켰다.

- 당일 작전과 군정의 시작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즉, 1961년 5월 16일 새벽 해병 제1여단장 김윤근 준장의 지휘로 해병대가 출동하게 된 것을 기점으로, 공수단은 박치옥(朴致玉) 대령에 의하여 출동하고, 제6군단 포병대는 군단참모 홍종철(洪鍾哲) 대령과 문재준(文在駿) 대령 · 구자춘(具滋春) 대령에 의하여 제933대대, 백태하(白泰夏) 중령에 의하여 제822대대, 김인화(金仁華) 중령에 의하여 제911대대가 각각 출동하였다. 한강 대교에 도달한 해병대와 공수부대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출동한 헌병 제7중대 병력과 약간의 총격전 끝에 서울시내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육군본부를 접수한 제6군단 4개 포병대와 합류한 뒤, 주력은 서울시청에 진주하고, 해병대는 치안국과 서울시 경찰국을, 공수단은 중앙방송국을 이날 상오 4시 30분경 각각 접수하였다.

또한 공수단은 장면 총리의 숙소이던 반도호텔을 급습하였으나, 총리의 도피로 체포하지 못하였다. 장면 총리는 애초 쿠데타 소식을 듣고 미 대사관으로 피신하고자 했으나 신원불상자라는 이유로 출입이 저지되었으며 재차 미 대사관 숙소로 피신하고자 한 시도도 같은 이유로 실패했다. 이에 천주교 신자였던 장면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혜화동의 깔멜수녀원으로 몸을 피하게 되었다. 당시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실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주요 군 지휘자 중의 하나였던 1군사령관 이한림은 쿠데타 진압에 적극적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모호한 입장과 국군끼리 피를 흘릴 수 없다는 윤보선 대통령의 입장으로 진압작전은 시행될 수 없었다.

주도세력들은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방황하는 국가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 목적을 전하고 이른바 ‘혁명공약’ 6개 항을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쳤던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 ②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③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 ④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기울인다. ⑤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⑥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이 공약은 김종필 주도로 작성되었으며 당시 지식인 사회에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사상계"를 많이 참조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방송은 이 날 ‘ 군사혁명위원회’가 조직되어 입법 · 사법 · 행정의 3권을 통합 장악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위원회는 임시 육군본부 상황실에 설치되었고, 장도영 참모총장은 그 날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직을 수락하였다.

장면 총리가 5월 18일 은신처였던 깔멜 수녀원에서 나와 중앙청에서 제69차 임시각의를 주재하고, 내각 총사퇴를 결의함으로써 군사혁명위원회에 정부를 이양하였다. 장면은 은신처에서 미국 대사관 등과 연락해 쿠데타 진압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총리가 은신처에서 나와 주도적으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미국의 군사력이 동원되지 않는다면 쿠데타 진압은 사실상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고 장면으로써는 달리 도리가 없는 막다른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장면 정권은 9개월 만에 와해되고 본격적인 군정이 시행되었다.

5.16 지휘관(나무위키)
•박정희 제2야전군부사령관 소장
•김종필 예비역 육군 중령
•박종규 소령 •이낙선 소령
•차지철 대위 •전두환 서울대학교 훈육장교 대위
•정봉욱 제5군단 부군단장 준장
•김신 공군참모총장
•채명신 제5보병사단장 준장
•문재준 제6군단 포병사령관 대령
•박치옥 제1공수특전단장 대령
•김재춘 제6관구사령부 참모장 대령
•장경순 육군본부 교육처장 준장
•한웅진 육군본부 정보학교장 준장
•김윤근 제1해병여단장 준장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