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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학살사건- 일제의 만행

nyd만물유심조 2023. 4. 14. 13:30


제암리 학살사건은 3·1운동사를 정리할 때 빠지지 않고 기록되는 사건으로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5일, 지금은 화성시가 된 경기도 수원군 제암리에서 일본 군인들이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지르며 총살한 끔직하고도 반인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당시 수원·화성 지역의 3·1 운동은 3월 중순에서 4월 초에 걸쳐 절정에 달했는데 3월 31일, 향남면 발안리(發安里)의 장날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를 외쳤다. 이 시위에서 분노한 군중에 의해 일본인 순사부장이 사망하였고, 주재소와 일본인 상점도 불에 탔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 주민을 교회에 가둔 후 불을 질렀으며, 마을 전체를 불태웠다. 기록에 따르면 교회에서만 23명이 사망하였고, 인근의 고주리 주민도 6명이 사망하였다.

- 주요 상황
수원·화성 지역의 만세운동이 격해진 것은 3월 28일 송산면 사강리의 시위부터이다. 장날을 기해 주재소 앞에는 7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를 주도한 홍면(洪冕)이 일본인 순사의 총에 중상을 입자 분노한 군중은 그를 살해하였다. 29일에는 성호면 오산리에서 장날을 기해 8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진행하였다. 유진홍과 안동순 등 주모자 7명이 체포되자 군중들은 주재소와 우편국, 면사무소를 습격하였으며, 일본인 상점과 가옥에 불을 질렀다. 수원 지역 곳곳에서 야간에 횃불시위가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3월 31일, 1,000여 명이 참가한 발안리 장날의 시위는 군중과 일본 헌병이 매우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인해 조선인 3명이 부상을 당하자 격분한 군중은 일본인 순사부장을 살해하였다. 또한 일본인 보통학교와 우편국, 면사무소에 불을 질렀다.

4월 3일, 우정면 주곡리 주민과 장안면 석포리, 수촌리 주민이 합세한 시위도 매우 격렬하였다. 이들은 장안면사무소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우정면사무소와 화수리 주재소로 향해 투석전을 벌였다. 이미 1,500명으로 늘어난 시위 인원을 향해 일본 헌병의 진압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주재소 헌병의 발포에 흥분한 군중은 주재소를 불태우고 가와바타(川端) 순사를 살해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4월 3일 장안면 화수리(花樹里)에서 일어난 2,000명 이상의 대규모 시위에서 일본인 순사 1명이 사망하자 진압 작전은 더욱 거칠어졌다. 수촌리(水村里) 출신의 김교철과 백낙열을 비롯해 차인범, 정순영, 이순모 등이 체포되었고, 수십 호의 민간인 가옥이 소실(燒失)되었다. 진압 부대는 4월 6일에 경성으로 철수하였으나 이후 발안리를 중심으로 시위가 계획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4월 9일부터 16일에 걸쳐 2차 진압을 단행하였다. 오산리와 사강리, 발안리 등을 포위하고 주모자를 검거하였으며, 민간인 가옥에 무차별적으로 불을 질렀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2일부터 14일까지 이루어진 진압 작전으로 803명이 검거되었고, 1,202명이 훈방되었으며, 10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당하였다. 또 276호의 가옥이 전소되었다.

3월 31일의 시위 이후, 일본 군경은 발안리 주변을 진압의 거점으로 삼았다. 발안리와 “그 이서(以西)의 인후부”에 해당하는 제암리·고주리를 확보하면 시위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4월 12일, 진압 부대가 발안리를 떠나자 이튿날 중위 아리타(有田俊夫)가 이끄는 육군 보병 79연대가 이곳의 치안을 맡기 위해 도착하였다. 15일 오후 2시경에 발안리 장터에서 400명 규모의 만세 시위가 재차 일어났고, 이를 해산시킨 아리타는 기독교와 천도교가 문제의 화근이라고 보았다. 오후 4시경에는 제암리에서도 시위가 발생하였다. 아리타 중위를 필두로 한 11명의 보병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趙熙彰)과 발안리에 살던 일본인 사사카(佐坂)의 협력을 얻어 제암리 주민의 도주로를 막고, 주민 20여 명을 교회당에 소집하였다. 교회당 안에서 훈계를 끝낸 아리타는 곧바로 사격 명령을 내렸다. 사격이 끝나자 교회당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몇몇 사람이 탈출을 시도했지만 밖에서 대기하던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노경태(盧慶泰)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 군인들은 고주리에서도 천도교도 김흥렬(金興烈) 등 6명을 살해하고 민가에 불을 질렀다.

일제의 기독교 탄압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4월 18일에는 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가 현장을 방문하였다. 19일에는 스코필드와 영국 대리영사 로이즈(W. M. Royds), 테일러, 노블, 케이블(E. M. Cable), 벡(S. A. Beck), 빌링즈(B. W. Billings), 헤론 스미스(F. Herron Smith)가 방문하였다. 스코필드는 20일에도 방문하였다. 이들 선교사들은 제암리사건을 기록으로 남기고 이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스코필드는 제암리와 수촌리 곳곳을 조사하고 이를 사진과 함께 보고서로 남겼다.

- 일본의 사후처리
제암리 학살 사건이 알려져 국제적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제암리 학살을 지휘한 아리타 중위에게 30일의 중근신 처분만 내리고 사태를 덮으려 했다. 그러나 제암리 학살 사건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일본에 대한 세계의 여론은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일본은 "아리타 중위가 미숙하고 주민들이 저항하여 우발적으로 사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했으며, 후일 김완섭은 "당시 조선 땅에 일본군이 없었는데 어떤 일본군이 학살을 하나?"라는 주장을 해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주둔 일본 육군이 "조선군" 이라는 이름으로 주둔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 중 헌병 병력 일부는 일반 치안 임무를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김완섭은 "이들은 치안 업무에 종사했으니 군인이 아니라 경찰"이라고 우겼지만 이들은 경찰 업무뿐만 아니라 헌병 업무까지 하고 있었던 것도 분명하며, 엄연히 이들의 법적 신분은 군인이다. 더욱이 당시 조선 주둔군 사령관인 우쓰노미야 다로 장군의 일기가 발견되면서 일본이 제암리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관여한 군인들은 30일간 근신처분을 받았고, 학살사건의 현장 지휘책임자인 보병 제79연대소속 아리타 중위는 나중에 군법회의 결과 살인, 방화에 대해 무죄 처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