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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수립

nyd만물유심조 2023. 4. 7. 10:55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는 1919년 4월 11일 중화민국 상하이시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수립되었다.
당시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3·1 독립선언서 및 3·1 운동에 기초하여 망명정부로서 임시정부를 중화민국 상하이시에 청사를 마련, 수립되었으며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해산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 당시의 참여자로는 여운형, 조동호,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이광수, 현순, 신익희, 조성환, 이광, 최근우, 백남칠, 김대지, 남형우,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진희창, 신철, 이영근, 조동진, 여운홍, 현장운, 김동삼 등 29인이 있었다. 이 중 여운형, 조동호,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이광수는 신한청년당 당원이었다. 그만큼 창립 당시에 신한청년단의 영향은 강했다.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게 신한청년당이었으니 당연하다.) 김구도 신한청년당에 관여하였지만, 정부 수립 당시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수립 며칠 후에 임시정부를 찾아왔다. 김규식도 신한청년당원이었지만 당시 미국에서 이승만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고 있어서 임정 수립 당시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1919. 3.1 운동이 국내외로 확산되는 가운데 3월과 4월에 걸쳐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가운데에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춘 곳은 연해주, 한성, 상해에서 각각 수립된 임시정부였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3.1 운동 직전인 2월에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중심이 되어 노령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3.1 운동 직후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상해로 집결하였고, 4월 10일~11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한 후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국내에서는 13도 대표들이 인천 만국공원(현재의 자유공원)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하고, 4월 23일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한성임시정부의 수립을 알렸다.

노령, 상해, 한성에 기반을 둔 개별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11일 대통합을 이루어 냈다. 한성정부의 정통을 잇고 연해주의 대한국민회의는 임시의정원과 통합하며 설치장소는 상해로 한다는 내용에 합의하였고 이로써 하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에 '대한민국임시헌장'을 개정하여 1919년 9월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하였는데, 이 헌법 전문에서 ‘3.1 운동의 자주 독립 정신을 계승하여 대한민국을 건설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초대 임시대통령으로 이승만의 당선을 선포하였고, 이어서 상해의 "독립신문"에 신내각인 초대 국무위원 명단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외무총장 박용만, 군무총장 노백린, 재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신규식, 학무총장 김규식, 교통총장 문창범, 노동국총변 안창호."

임시정부 27년은 상하이 시대(1919~1932년), 이동 시대(1932~1940년), 충칭 시대(1940~1945년)로 나눌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활동 내내 의원내각제를 기반에 둔 정부 형태를 고수하였다. 이는 대통령제를 채택했던 1919년부터 1925년 사이에도 유효하였다. 이후 1925년부터 2년간 순수 의원내각제를 실행하다 1927년부터는 국무위원을 주축으로 한 집단지도체체를, 1940년부터는 의정원에서 선출한 주석이 대한민국을 이끄는 주석제를 채택했다. 임시 정부는 입법 기관인 임시의정원, 사법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을 두어 3권분립 헌정 체제를 갖추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6년 9월 임시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원제를 채택하였으며 이후에는 위원내각제가 정부형태의 주류를 이루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일본군에 쫓겨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중국 상해, 항주, 장사, 유주 등을 거쳐 중경으로 옮겨가며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다양한 방법의 저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 상해 임시정부의 초기및 주요활동
통합 임시정부가 출발부터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대한국민의회를 이끌었던 문창범(文昌範)은 상해 임시정부 조직이 한성정부 개조 수준에 그치자 이에 반발하여 내각 취임을 거부하였고, 신채호(申采浩)를 비롯한 무장투쟁세력은 이승만(李承晩)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그의 위임통치(委任統治)를 비판하면서 북경으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안창호의 설득으로 11월 러시아의 이동휘(李東輝)가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 불완전하나마 통합 정부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7부 1국 체제로 조직된 임시정부는 통일·군사·외교·교육·사법·재정 등 다양한 방략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그 중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은 안창호의 주도로 실시된 연통제(聯通制)와 교통국(交通局)의 설치였다. 이를 통해 국내의 행정을 장악하고 교통망을 확보하여 임시정부의 통신 연락과 주요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이 연통제와 교통국은 선전활동과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거점 조직 확보와 함께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부터 군사 활동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였다. 이는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 해 말 상해에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고 3기생까지 모집하였다. 또한 공군 창설을 위해 비행사 양성을 추진하여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이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두 학교는 모두 재정난으로 폐교되었다. 이외에도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해 국내 비밀결사 조직과 연계하였는데, 대한독립애국단(일명 철원애국단)을 비롯하여 조선민족대동단·대한민국청년외교단·대한민국애국부인회·대한국민회 등이었다. 또한 만주에서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로 편입시키는 한편, 서간도의 대한청년연합회 의용대·한국독립군비단·대한독립단 등을 통합하여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을 조직하고, 주만참의부(駐滿參議府)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한편,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한 가장 큰 재정기지는 재미한인사회였고, 재미한인사회를 대표하는 기구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였다. 3‧1 운동 직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金奎植) 등 대표단에게 3,500달러의 경비를 송금하였고, 안창호를 상해 임시정부로 파견하면서 2만 달러의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이후 재미한인사회는 약 100만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임시정부에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9년 말부터 임시정부의 재정을 담당하던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에 의해 발각되기 시작하였고,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에서 승리한 이후 만주지역 독립군 조직이 러시아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면서 임시정부의 활동은 1920년 말부터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끌던 김구는 임정의 활로를 모색하게 위해 미주와 멕시코, 하와이, 쿠바 등지의 한인 교포들로부터 받은 성금을 바탕으로 임시정부 산하 공작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창설하게 된다.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 소속의 이봉창은 도쿄에서 히로히토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했다. 이때 이를 보도한 한 중국 신문이 '일본천황에 대한 테러가 아깝게 실패로 끝났다.'고 보도했다. 일본은 만주국을 수립할 목적으로 눈을 돌리기 위해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고,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일본은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축하 기념식을 열었고, 바로 여기서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만주사변과 상하이사변으로 일본에게 악감정을 갖게 된 중국인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1940년 9월 17일에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얻어 지청천을 총사령으로 삼는 한국광복군을 조직했다. 여기에 소속된 장군에는 백파 김학규 등이 있었다. 광복군은 이후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인도-미얀마 전선에 투입되어 비전투 공작 활동을 수행했으며, 미국 OSS(미군 전략 정보처)와 합동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실행하려 했으나 1941.12.7 일제의 미국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으로의 확전이 된 후 일제가 조기 항복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일각에서는 만약 일본이 조금만 더 늦게 항복을 해서 이 작전이 실제로 수행되어 성공했다면 임시정부와 한국 광복군 역시 엄연한 연합국 자격으로 스스로 독립을 성취해낸 것이므로 남북분단과 같은 상황이 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1943년 카이로 회담 직전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은 식민지의 독립이 전후 인도 제국의 독립 의식 고취에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미국 FDR에게 특사를 보내어 전후 한반도를 신탁통치 구역으로 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는 미국 언론에 보도되었으며, 임정도 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에 주석 김구는 장제스를 만나 카이로 회담서 한국의 독립을 결의해줄 것을 당부했고, 장제스는 이를 약속하였다. 이후 카이로 회담서 장제스는 미국과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독립을 강력히 주장했고, 결국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문구로 합의가 이루어져 한국의 독립이 보장되었다.

- 환국과 통일정부 수립 노력
미국 정부는 1945년 6월 8일자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하여 주권의 승인을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미군정청과 연합군 최고사령부 및 주중미군과 OSS도 똑같은 내용의 답장을 김구에게 통보했다. 트루먼 행정부의 성명에 따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반도의 국민들이 직접선거나 간접선거로 참정권을 행사하여 구성된 주체가 아니므로 이들에게 주권이 없다는 논리에서였다. 결국 임정 요인과 광복군 전원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여 한반도 내부에서 일반인 신분으로 정치적 활동을 한다. 미군정은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아 38선 이남 한반도를 통치하게 된다.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던 까닭에 임정요원들에게 정부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것을 통보하였다. 이에 대해 임시정부 내에서 찬반논란이 있었으나 부득이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미국이 취한 임시정부 귀국 지원 조치는 15인승 비행기 1대 뿐이었다. 때문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2진으로 나누어 귀국해야만 하였다. 주석과 부주석인 김구와 김규식(金奎植)을 비롯한 15명이 11월 23일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고, 외무부장 조소앙과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洪震) 등은 12월 1일 김포비행장이 아닌 전라도 군산비행장에 도착하여 다음날 서울로 올라와야만 했다. 더구나 미군정이 임시정부의 환국을 알리지 않았던 탓에 환영인파조차 없었다.

임시정부는 환국 직후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위원회를 조직하여 내무부 산하에 두었다. 당시 내무부장은 신익희(申翼熙)였다. 정치공작대는 임시정부 조직망 확대와 국민적 기반 확보를 목적으로 활동하였고, 행정연구위원회는 향후 수립될 정부 수립에 필요한 행정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2월 정치공작대 조직은 면 단위까지 조직을 완료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12월 28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해 신탁통치를 결의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임시정부는 즉각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였다. 이어 4개국 원수(元首)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채택하여 발송하는 한편, 정당·종교·언론 등 각 단체 대표들과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하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하고 반탁투쟁을 주도하였다. 이 원칙에 따라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위원회는 반탁시위운동을 준비하는 한편, 12월 31일 내무부장 명의로 포고문 「국자1호」와 「국자2호」를 발표하여 사실상 정부로서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포고문을 본 미군정은 임시정부가 미군정의 정권을 빼앗으려는 ‘임시정부의 쿠데타’로 규정하고 신익희를 체포하여 신문하였다.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는 미군정의 감시와 견제를 받게 되는 한편, 더 이상 정부로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환국 직전 임시정부는 과도정권 수립을 결의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1946년 2월 과도정권 수립을 위해 각계 인사 195명을 규합하여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가 이승만과의 결탁을 통해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개편하면서 미군정의 자문기관이 되었다. 이는 임시정부를 해체하려는 미군정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였다. 이 일로 김원봉·장건상(張健相)·김성숙(金星淑) 등은 임시정부를 탈퇴하였고, 임시정부도 민주의원을 부인하면서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은 서로 다른 단체임을 선언하였다. 비상국민회의는 과도정권 수립을 위해 다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자, 결국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와 민족통일본부와 통합을 추진하여 1947년 2월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국민의회는 1947년 3월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김구를 추대하고 국무위원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과도정권에 불참한데다가 과도정권의 존재마저 무시하는 바람에 국민의회는 9월 대한국민회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대한국민회 역시 이승만이 주석직을 거부하는 바람에 그 역할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1947년 들어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갔다. 유엔은 한국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수립하면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총선거 실시와 정부 수립을 감독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유엔위원단은 귀국 후 북한지역을 방문코자 하였으나 소련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승만·김구·김규식·김성수(金性洙)를 만나 정부 수립을 둘러싸고 논의를 하였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반면 김구와 김규식 등 임시정부 세력은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엔위원단은 1948년 2월 임무수행이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결정에 대해 임시정부 요인들은 남한의 단독선거 불참을 선언하고 북한에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의하였다.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가한 김구·김규식 등은 통일된 민주정부 수립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합의는 남과 북 어느 곳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은 유엔위원단의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