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좌진(金佐鎭, 1889. 12.16~1930. 1.24)은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의 군인으로 충남 홍성군 고도면 (현재 갈산면) 행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 김형규와 어머니 이상희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3살 때 부친을 여의었지만 넉넉한 재산으로 경제적 문제는 없었으며 모친으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고 성장했다. 김좌진의 자는 명여(明汝)이고 호는 백야(白冶)이다. 1930년 1월24일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
김좌진은 1905년 가노를 해방하고 1907년에는 고향인 홍성에서 호명 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여 지방의 청년 자제들에게 신학문을 교육시키는 계몽 운동을 전개하며, 홍성에 대한협회 지부와 기호 흥학회(畿湖興學會)를 설립하여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서울오성 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지냈으며, 청년학우회 회원 및 한성신보 이사로도 활동하였다.
1910년에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에는 이창양행(怡昌洋行)이란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았다. 1915년에는 박상진(朴尙鎭)이 주도한 대한광복회에 참가하여 맹렬한 항일 활동과 군자금 모집 등에 주력하였으며, 일경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7년 출옥,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후 1918년 음력 11월 서일, 여준, 유동열 등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에 서명하였으며, 1919년 8월에는 정의단을 개편하여 군정부로 개편하는 한편, 북로사령부 제2연대장 겸 간북총판국(墾北總瓣局) 재무참사(財務參事)로 일하였다. 이후 동년 12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결성되자 총사령관으로서 서일을 보필하였으며, 왕청현 십리평(汪淸縣十里坪)에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하고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20년 10월 21일, 마침내 독립군과 일본군이 청산리에서 만났다. 김좌진 장군은 백운평 골짜기에 진을 치고 숨은 뒤 일본군이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이때 일본군은 물러날 길이 좁아 우왕좌왕하다 죽거나 다치는 등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이를 시작으로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연이어 벌여졌는데, 특히 김좌진 장군의 대한군정서군은 백운평, 천수평, 어랑촌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주력부대로 급상승했다. 청산리 전투는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과 희망을 심어주었고, 한국독립군이 벌인 전투 중 가장 대표적인 전투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북진을 단행하여 북만주 밀산(密山)에 도착하였으며, 10여 개의 독립군 단체가 통합, 대한 독립군단이 결성되자 부총재로 취임하였다. 1925년 3월에는 북만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 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성동 사관학교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 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때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27년 신민부 중앙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여 신민부를 통솔하며, 한인 사회의 보호에 주력하였으며, 1929년에는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족 총연합회를 조직하고 무정부주의 사상에 입각한 적극적인 독립 투쟁의 전개를 위해 노력하던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고 항렬이 같은 아우뻘인 김종진 등 아나키스트 (흔히 무정부주의자로 번역되지만 아나키즘은 비단 정부뿐만이 아닌 국가, 민족주의를 넘어서 자본주의와 같은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체제를 반대하는것)들을 받아들였다.
이에 위협을 느끼고 공산주의 선동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1930년 1월 24일 김일성(金一星, 본명 김봉환)의 사주를 받은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박상실(朴尙實, 일명 : 尙範, 金信俊)에게 길림성 해림현 산시진 도남촌(현 헤이룽장성 하이린시 산스진 다오난촌)에서 1930년 1월 24일 41살의 젊은 나이에 암살됐다.
이 때 김좌진은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 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좌진을 살해한 공산당원 박상실은 얼마 안있어 현지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당시 만주는 봉천군벌의 위세가 남아있던 시기였기에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죽인 혐의로 사형이 선고된 후에는 봉천으로 이송되어 사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