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제국 하얼빈역에서 대한제국 출신의 일본 제국 제4, 6대 내무경, 초대 내각총리대신, 초대 귀족원 의장, 초대 추밀원 의장, 초대 한국통감을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포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 특파대사로 서울에 와서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다음 해 3월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친일내각을 조직하여, 정치·외교뿐만 아니라 재정·금융·화폐·체신·교통 등 제분야를 장악하여 조선의 식민지화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개된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항쟁 등 반일민족운동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까지 장악한 뒤 군대까지 해산시켜 버렸다. 이와 같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병탄작업은 이토에 의해 완결되어 형식적 절차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1909년 6월 이토는 소네아라(曾禰慌助) 에게 통감직을 물려주고 일본 추밀원 의장(樞密院議長)이 되어 일본에 가 있었다.
- 경과.
1905년 초대 한국통감을 지냈다가 막후로 물러나 일본 제국에서 추밀원 의장을 지내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제국과의 철도 문제, 경제 현안, 러일전쟁 뒷처리 등을 논의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 재상인 코코흐체프와 회담을 갖기로 하여 러시아가 청 제국에게 조차한 하얼빈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는 회담을 위해 러시아 측에서 제공한 특별 열차를 타고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1909년 2월 7일 안중근을 포함한 12명의 동지들은 연해주에서 동의단지회를 결성하며 각자 왼손 약지를 잘라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을 쓰며 각자 암살에 대한 결의를 다졌으며, 이후 10월 21일 안중근은 신문기사에 이토 히로부미가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을 방문하여 러시아 재무상과 러일 간 경제 회담을 갖는 목적으로 방문한다는 정보를 알아내어,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계획한다. 25일 안중근은 거사 동지인 우덕순과 함께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출발하였다. 1박을 머문 끝에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과 우덕순은, 러시아에서 세탁소를 운영한다는 재러시아 한국인 조도선을 만난다. 그는 거사에 동의하였다.
그 중 기차들이 중간에 정차하게 되어서 쉬어간다는 '차이자거우(蔡家具/채가구)역'에서 우덕순, 조도선이 거사를 분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신문 기사에 이토 히로부미의 특별 열차도 차이자거우 역에 정차한다는 예상이 나오자, 세 사람은 차이자거우로 향하여 기차역 객사(客舍)에 머물며 거사를 준비한다.
그러나 철도들의 분기점인 차이자거우역은 경비가 삼엄해 객사에서 나가 의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데다가 러시아 육군 병력이 보안을 이유로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숙소 문을 잠가버려 탈출도 불가능했다.
다행히 당초에 차이자거우에 왔던 안중근은 하얼빈 거사를 위해 우덕순, 조도선에게 차이자거우 거사를 분담하며 자신은 이미 하얼빈으로 이동하였던 상태였다. 만약 이 때 안중근마저 객사에 갇혔다면 하얼빈 거사도 실패하였고 이토 히로부미도 무사히 경제 회담을 마치고 일본으로 살아서 귀국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차이자거우에서 거사에 실패한 우덕순, 조도선은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 성공 이후 차이자거우역 객사에서 러시아 육군 헌병에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차이자거우 거사가 실패함에 따라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건너가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와의 운명을 결정할 거사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단신으로 하얼빈에 도착하여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기차역에 입장했다. 서양인들은 물론, 한국인과 일본인도 서로를 외모로 구별하는 게 힘들다. 인종적 특징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기차역에는 양국 수뇌를 환영하기 위해 일본인과 러시아인, 중국인들이 나오게 되었고, 신변 경호를 위해 러시아 육군 헌병 및 청 육군들이 호위 삼아 경계를 서고 있었다.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 일행을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고, 기차 안에서 이토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자 환영을 나온 군중들이 러시아 제국 국기와 일장기를 흔들며 양국 수뇌를 환영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와 면식이 없었던 탓에 수많은 군중과 섞여 있는 이토 히로부미를 알아보지 못했고 일을 그르치는가 했다가, 일부 군중이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을 부르자 백발에 길고 흰 수염을 가진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을 보고 그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임을 인식했다. 이에 품 속에 있는 권총을 준비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조준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육군 병력 사이에 지나가고 있는 순간 그를 향해 첫 발을 쏘았다. 첫 발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몸을 관통하였고, 안중근은 계속해서 2발 ~ 3발을 추가로 발포했다. 이토는 결국 땅바닥에 쓰러졌고, 안중근은 혹시 다른 사람이 이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행들 중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궁내성 대신 비서관 모리, 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에게도 총탄을 발포하여 중상을 입히고 총알 한발을 남겼다. 그러나 안중근은 즉시 청과 러시아의 호위병들에게 체포되었고, "코레아 후라!!!(한국 만세)"라 외쳤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는 총탄을 맞은 직후 기차 안으로 옮겨져 자신을 수행하던 의사 고야마 젠의 응급 처치를 받았지만 20여 분 만에 숨이 끊어졌고, 동행했던 그의 손자가 이토 히로부미의 유언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하얼빈은 청나라 땅에 러시아 조계지이므로, 러시아 내지는 청나라에서 조사 후 재판받는 게 맞았다. 실제로 한국인 변호사들은 러시아 헌병이나 청나라 경찰이 이를 조사하고 청나라에서 재판하기를 원했지만, 청나라에 있던 일본제국 경찰 영사는 상황의 심각성에 따라 안중근의 신병을 일본으로 넘겨 버렸다.
안중근이 사살 대상으로 이토를 택한 것은 그가 ‘동양평화를 해치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제일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안중근이 제시한 이토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
<이토 히로부미의 罪狀 15항목>
一.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一.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에 대하여 매우 불리하게 한 일
一. 1907년 12개조 조약을 체결하여 모두 한국에 대하여 군사상 대단히 불리하게 한 일
一. 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일
一. 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 일
一. 불평등 조약의 체결에 대하여 분기한 한국인 의병 등 양민을 살해한 일
一. 한국의 정치, 기타의 권리를 약탈한 일
一. 한국 학교에서 사용한 좋은 교과서를 폐기처분한 일
一. 한국 인민에게 신문의 구독을 금한 일
一. 화폐개혁과 第一銀行券 발행한 일
一. 3백만원의 국채를 모집하고 한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토지를 수탈하기 위하여 사용한 일
一. 동양평화를 교란시킨 일
一. 한국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보호의 이름을 빌어 한국 정부의 일부 인사와 의사를 통하여 한국에 불리한 시정을 펼친 일
一. 일본 孝明先帝를 살해한 일
一. 한국민이 분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황제나 기타 세계 각국에 대하여 한국은 무사하다고 속이고 기만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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