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12월24일, 경상북도 문경에서도 오지라 할 수 있는 산북변 석봉리 석달부락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날 정오께 중무장한 국방군 70여 명이 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군인들은 불문 곡직한 채 26호에 달하던 마을 가옥에 불을 지른 후 놀라 뛰쳐나온 주민들을 마을 앞 논두렁에 몰아세웠다. 곧바로 주변에 설치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삽시간에 부락민 66명이 시체로 변했다. 학살을 마친 군인들은 동네 저편 산자락으로 이동해 마침 방학식을 마치고 하교하던 국민학생 15명을 모아놓고 집중 사격을 가해 10명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어서 이 마을 이장 채명진씨(당시 29세)의 인솔 아래 문경 중학교 건립을 한 벼 공출작업에 동원됐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마을 청년 7명에게도 총탄 세례가 퍼부어졌다. 약1시간에 걸친 양민 살륙 작전으로 전체 주민 1백24명 중 86명이 죽었다. 그 가운데는 여자가 41명, 국민학생이 10명, 채 돌을 넘기지 않은 어린애도 5명이나 포함돼 있다.
부상만 입은 주민들은 '확인 사살'되었으며 천운으로 부상을 입었지만 시체 밑에 깔리는 바람에 남자 5명과 여자 7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군인들의 방화로 마을 27가구 중 23호의 가옥이 불타 버렸다.
이 날의 잔학 행위에 직접 책임이 있는 한국군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유진규 소위(25연대 3대대 7중대 3소대), 김점동 하사(25연대 3대대 7중대 3소대), 안택효 중사(25연대 3대대 7중대 2소대).
한편, 사건 이듬해 1950년 일어난 6.25전쟁과 이승만 정부의 공포정치로 하소연커녕 입도 벙긋하지 못한 채 한맺힌 세월을 살아가던 유족들은 사건이 발생한지 11년이 지난 1960년 4.19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억울한 사연을 풀어줄 것을 호소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