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누구나 해당될 내용

nyd만물유심조 2020. 2. 29. 20:47

 

 

신간: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김영옥 메이 이지은 전희경 지음/봄날의 책.

지은이들은 ‘누가 나를 돌봐줄 것인가?’라는 질문을 ‘나는 누구를 돌볼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동시켜야 한다고 본다.

 

 

당신의 새벽 3시는 어떤가? 이 책 속 새벽 3시는 통증이 들쑤시는 때이고 아픈 이 머리맡에서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이고 늙어가는 몸이 뒤척이는 순간이자 우리가 몸으로 사는 존재라는 걸 통렬하게 자각하는 시간이다. ‘몸을 잊고 살아도 되는 사람들’에게 ‘몸으로 사는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다. 이 질문들은 고정관념에 균열을 낸다. 의존과 독립, 젊음과 늙음은 반대말인가? 권리와 의무는 엮인 한 쌍인가? 살 가치가 있는 삶은 따로 있나? 효율성 높은 몸이 규범인 곳, 약함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곳에선 누구에게나 닥칠 그 ‘몸으로 사는 시간’은 공포일 수밖에 없다. 두렵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올 그 시간을 보려 하지 않는다.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 속 질문들은 사람의 기본값은 취약성이고, 우리는 취약하기에 연결될 수 있다는 걸 드러낸다. ‘새벽 세시’를 겪었거나 겪고 있는 필자들이 던지는 질문에 직면해야 하는 까닭이다.

 

의존해야 하는 상황을 왜 두려워해야 하나? “우리 사회에서 독립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발달과 교육의 기본목표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현재의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는 ‘몸에 대한 통제’에 기반을 두어 성립하고 지탱된다.” 아프고 늙은 몸은 비용이자 짐덩이 취급당한다. 그런데 모두 누군가의 노동에 기대어 입고 먹는다. ‘어떤 의존’만 ‘의존’이라 불린다. 여성의 가사 노동에 ‘의존’하는 남성이나 노동자에게 ‘의존’하는 회장에게 의존적이라고 하진 않는다. “독립과 의존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지배체제를 지속시키는 허구적 프레임”이다. 권리는 의무를 다해 사는 상품이 아니다. 돌봄을 받을 권리는 사람에게 이미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아픈 이들은 존재만으로도 “인간의 취약함을 받아 안는 방식으로 사회를 조직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늙고 아프면 누가 나를 돌봐줄까?’ 이제까지 그 대답은 대체로 가족, 그 안에서도 여성이었다. 그 돌봄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존중받지 못하는 ‘독박’으로 돌봄은 고역이 됐다. ‘늙고 병 들면 믿을 건 가족밖에 없다’지만 노인 학대의 90%는 가족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면 국가? ‘가족 같은 서비스’를 내세우는 공공영역에서 돌봄노동의 성비 불균형은 더 커진다. 존엄한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국가정책은 필요하지만, ‘관계’를 쏙 빼고 ‘국가’만 이야기하는 건 공허하다. 그러면 돈으로? 우리는 모두 자신의 고유성을 알아봐 줄 관계 속에서 앓고 싶다. 

 

“돌보고 돌봄 받기를 기대할 수 있지만 어떤 돌봄도 ‘당연’하지는 않은 관계, 헌신과 인내가 깃든 돌봄을 ‘가족애’나 ‘효심’으로 퉁치지 않고 제대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관계”, 그런 관계를 만들어갈 중심으로 전희경은 ‘시민’을 내세운다. 돌봄의 책임과 권리를 공정하게 나눠서 지는 존재들이다. “‘누가 나를 돌봐줄 것인가?’라는 질문을 ‘나는 누구를 돌볼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동시키지 않는다면 그러한 논의는 윤리적이지 않을뿐더러 유의미한 대안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취약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려면 돌봄을 받거나 돌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돌봄이 시민의 책임과 권리가 되지 않을 때 ‘보호자’는 환자와 함께 고립된다. 이들이 떠밀려 간 세계는 “과거는 아득하고 현재는 정신없고,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고립무원이다. 언제 벗어날지 알 수 없다.

 

그 안에서 보호자들은 ‘좋은 간병’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아픈 사람의 역사와 소망, 필요에 반응해야 하는 일은 끝이 없다. 이 닿을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보호자는 “마음을 쓴다.” 마음을 쓰다 지배로 흐르기도 한다. 그래서 잘 돌보려면 잘 다가서야 하지만 동시에 잘 물러서야 한다. 그러려면 두 사람의 고립무원에 비상구를 뚫어야 한다. “‘우리 둘만이 아닌’ 누군가 다른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실감”이 필요하다. 

 

30대를 “아프며 보낸” 메이는 “가장 아팠던 시기에 나는 내가 ‘이곳’에 없다고 느꼈다”고 썼다. 젊음은 건강, 활기, 패기 따위와 짝패를 이루기에 젊고 아픈 사람은 더 외롭다. 나이에 따라 성취해야 할 리스트가 정해진 사회에서 이들은 ‘나잇값을 못하는 청춘’이다. 또래들은 몸이 부서져라 생의 주기표에 따라 살아가고 이 트랙에서 벗어난 이들은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된다. 그들에게는 ‘낫거나 죽거나’뿐인 선택지가 들이밀어 진다. “‘젊지만 아픈’ 상황을 ‘젊고 아픈’ 삶으로 변환하려는 이들은 이 선택지 밖으로, 아픈 몸과 살아가는 샛길을 낸다. (…) ‘몸을 통제하는 것’을 사회생활의 기본으로 삼는 사회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누구나 새벽 세시의 몸들이다. 애써 이를 잊으려는 건 우리가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쓸모’ 위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원래 취약한데 취약하지 않은 상태를 기본으로 삼으니 모두 불안하다. 아프고 늙어가는 몸들은 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필요한 질문을 던진다. 시민으로 연결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사람으로 아프고 늙을 수 있다. 책이 제시하는 해법이 모호하다 느낄 수 있지만, 깊은 성찰을 담은 질문에서 해법의 시작과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