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9일은 러시아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에 반발한 공산당 강경 보수파들의 '8월 쿠데타'가 발생한지 20주년을 맞는 날이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몰아내고 그가 추진하던 개혁 정책을 되돌리려던 보수파들의 마지막 저항이었으나 미숙한 반란은 결국 3일 만에 실패로 막을 내렸고 이후 소련은 급속한 붕괴의 길로 내달렸다.
쿠데타 주도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반발해온 국가보안위원회(KGB) 위원장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소련 부통령 야나예프, 수상 발렌틴 파블로프,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내무장관 보리스 푸고 등 8인의 보수파가 주도하고 있었다. 쿠데타 세력은 하루 전인 18일 흑해연안 크림반도의 별장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던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야나예프 부통령에게 권력을 넘길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이들은 결국 고르바초프를 별장에 연금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철저히 차단한 채 쿠데타에 착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 오후 TV 방송을 타고 국내외로 퍼져나간 옐친 대통령의 탱크 위 연설은 쿠데타 세력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특히 옐친은 의회 의사당 건물을 봉쇄한 진압군의 탱크 위로 올라가 개혁에 맞서려는 쿠데타 세력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전 국민적 저항을 촉구했다. 옐친의 호소에 더 많은 시민이 의회 건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시위대 진압에 나섰던 쿠데타 군 일부도 개혁 세력 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21일 새벽 쿠데타 군 장갑차가 시위대가 쳐놓은 바리케이드를 밀치고 백악관 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부 시민이 희생되면서 결국 야조프 국방장관은 이날 모스크바에 진주한 모든 병력에 철수 명령을 내렸고, 쿠데타 지도부는 대표단을 크림반도 별장으로 보내 고르바초프와 재협상을 시도했으나 이들과의 면담을 거부했고 뒤이어 복구된 통신선을 통해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모든 결정은 무효라고 선언하면서 고르바초프는 22일 크림반도로 찾아온 개혁파 지도부와 함께 모스크바로 귀환, 쿠데타 지도부는 모두 체포되었다. 내무장관 푸고는 체포에 앞서 권총으로 자살했고 개혁에 저항하던 보수파의 쿠데타 시도는 3일 천하로 끝나고 만 것이다.
이후 옐친은 공식적으로 소련의 권력의 절반을 고르바초프로부터 넘겨받았다.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 내에서 공산당의 활동 금지와 더불어 공화국 내의 소비에트 자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연방 해체에 박차를 가했다. 그 해 12월 8일 소련에 속했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주요 3국 지도자가 독립국가연합(CIS) 결성 협정에 서명하면서 1917년 사회주의 혁명과 함께 출범했던 소련은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 고르바초프는 그 해 12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국가 ‘소비에트 연방’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옐친이 신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CIS)을 이끄는 최고 권력자가 됐다.